말라기 2장 1-9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

본문에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질책하십니다.  제사장은 당시의 종교적 권위와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의 말대로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어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간격을 설명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편인가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간격이 이렇게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소외 당하고 가난하고 버림 받은, 약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불이를 징계하고 올바름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지식과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항하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수없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장 1-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히브리서 1장 3절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은 윤리적 도덕적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없이 올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와 역사와 시간의 창조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기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사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죄인이 됩시다.

우리 모두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말라기 1장 4-14 하나님과 우리의 간격

본문은 하나님의 한탄을 계속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주 악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커다란 계곡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유대인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사실 본문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v.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은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멸시를 당하셨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v.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에게 더려운 떡을 드리고도 개끗한 떡을 드렸다고 강변합니다.

(v.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그들의 총독에게는 더 좋은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사람도 먹지 않을 병든 제물을 드렸습니다.

(v.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이러한 짓을 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을 할 수 있느냐?

(v.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차라리 나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 성전을 없애 버리는 것이 낫다.

(v.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제는 너희를 버리고 이방인을 택해서 그들의 제사를 받겠다.

(v.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이제는 너희들이 여호와에게 드리는 제물도 더러운 것을 드릴 수 있다고 한다.

(v.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제물들은 훔친 것과 병든 것들이다.  나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

(v.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천벌을 받고 죽을 인간들아, 좋은 것은 너희들이 갖고 나쁜 것은 나에게 주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오늘 날 있어도 좋은 하나님, 없어도 좋은 하나님,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유대인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말라기 1장 1-3 (부모에게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자식?)

말라기는 구약 마지막 성경입니다.  말라기의 의미는 히브리어의 Malak은 왕, 대변인, 사자를 의미합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성경의 배경을 바벨론 포로 귀환해서 성전을 완공한 후로 봅니다. 신약 성경이 나오기 전,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성경의 마지막에 위치합니다.

유대인들은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됐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다시 짓고 난 후에 그들에게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실질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대는 페르시아 이후 그리스의 알렉산더, 로마에 의해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셨다면 현실적 증거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현실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 생활은 형식적이고 타락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말 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v.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은 야곱의 형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랑의 증거는 너가 나를 사랑한다면 대가를 치르라고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헌신적으로 희생하기에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인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적 사랑에 익숙합니다.  사랑한다며 누군가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어 우리는 사랑 받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게는 매를 들고 잔소리하고 심지어는 집에서 내어 쫓아내기도 합니다.  어떤 자식은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 계모와 계부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철없는 자식은 가출도 합니다.  자신이 남의 집 자식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자식답게 키우는 것 후자의 사랑입니다.  전자의 사랑은 자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이 뱃속에 있을 이미 이렇게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택과 은혜가 야곱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시대의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은혜를 받은 백성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현실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가 아니라 계모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콩쥐의 계모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모든 사람에게 일반 은총을 주셨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건강, 지식, 물질, 재능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한 경쟁이고, 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들이 특별 은총을 받았기에 하나님에게 일반 은총까지도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는 자식이 부모에게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는 학생의 노력과 수고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을 요구하는 자식은 한심한 자식입니다.

오늘 날 야곱의 후손,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현실적으로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식들이 매일 놀면서 우리에게 공부 잘 하게 해 달라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좋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4:9-21 거래의 달인에서 믿음의 달인으로

요즘은 거래의 달인이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Trump도 거래의 달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거래의 달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세상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적들은 응징을 당합니다.  또한 이 세상은 새로운 인적구성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슥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세상이 됩니다.  이렇게 달라집니다.

 (슥14:20-21)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슥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제사장은 이마에 성결이라고 씁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결이 말의 방울에도 사용됩니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거룩해집니다.   달라집니다.  모든 것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21절 후반절에 나타납니다.

(슥14:21-b)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가나안 사람만 제외됩니다.  가나안은 다른 번역에는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가나안 해변에서 무역을 하는 페니키아인을 의미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자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입니다.  마가 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간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제물을 사는  사람도 쫗아내십니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교인들도 쫓아내십니다.

(막11: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아무나는 성전에서 제물을 구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싹군 목사도 쫓아내시고 교회에 거래하러 오는 교인도 쫓아내십니다.

장시의 목적은 이익입니다.  목회도 이익이 되면 하고 신앙 생활도 이익이 되면 합니다.  손해를 보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챙기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전에 머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물질적 이익, 명예와 자존심, 자신의 가치관이 손해를 볼 수 없다면 장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나의 이익보다 나의 손해가 많습니다.  믿음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믿고 의지하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손해 봐야합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을 마지막에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의 이익과 손해의 분기점을 계산하는 거래의 달인에서 믿음의 달인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4장 1-8 -마지막은 희망

모든 것에는 시작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시작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이 찾아올 때에는 두렵고, 아쉬운 것이 많게 됩니다.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는 기다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세상의 모든 법칙은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입니다.  현재의 모든 것이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다음에 결과를 치를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원인를 마지막 너머의 세계의 결과와 직결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마지막에 대한 경고입니다.  무서운 심판이 나타나고 환경적 변화가 나타납니다.

(v.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v.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은혜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파괴합니다.  은혜는 인과응보와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불행은 종말을 인과응보로 해석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합니다.  이상하게도 종말에는 은혜가 사라집니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은 종말론으로 교인들을 협박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사용합니다.

기독교를 불교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끝까지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도 무서운 종말이지만 이렇게 은혜가 나타납니다.

(v.4-6)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v.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v.6)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피신할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5절에서 보듯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피신입니다.

(v.7-8)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v.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을 가보시면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와 능력이 되는 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이 부족한 고지대입니다.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갑니다.  동쪽은 사해, 풀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입니다.  그리고 물이 서쪽으로 흘러 갑니다.  서쪽도 황량한 유대 광야입니다.  오늘 날의 브엘세바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삶입니다.

 

 

스가랴 13장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

본문은 유대의 죄악을 용서 하고 난 후에 거짓 종교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언서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거짓 종교인, 거짓 예언자와 선지자,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하여 일한 싹군 목자인 것을 나타냅니다.

(슥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선지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실지로는  농부이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에게 속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납니다.  삼분의 이는 멸망을 합니다.  삼분의 일은 살아 남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삼등분 됩니다.  우주만물, 자연계, 해와 달 별도 삼분의 이는 심판을 당합니다. 우주만물, 자연계, 해와 달 별 삼분의 일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삼분의 의와 심판과 삼분의 일의 구원으로 나누어 집니다.

(슥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우리는 이러한 심판에 대해 매우 절망스럽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많은 이단을 이것을 무기로 삼아 기독교를 공포의 종교,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으로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삼분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삼분의 일은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실력과 능력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를 속이는 사악한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삼분의 일에서 주어진 모습은 불 가운데서 연단을 받습니다.  이러한 미래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오늘부터 이러한 미래의 삶을 훈련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 주어진 고난과 슬픔은 고난도 아니고 슬픔도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스가랴 12장 10-14 실수 하지 아니하는 손의 힘

사람들은 실수 하기전에는 자신이 잘못한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수 후에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실수 하지 아니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수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보면 失手 놓칠 칠 // 손수입니다. 수에 손수를 씁니다.  손은 권한을 의미합니다.  힘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한을 잘못 쓰면 실수합니다.  후회합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의 통곡입니다.  회개입니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유대인들이 당 할 회개의 통곡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힘, 정치적인 힘,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밤에 주님을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가 주님의 장례를 치룹니다.  2 사람의 특징은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권한과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힘과 권력을 잘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12-14절에 회개하는 족속이 나타납니다.  다윗 족속은 왕의 족속입니다.  레위 족속은 제사장 족속입니;다.  나단 족속은 선지자 족속입니다.  시므이 족속은 일반 지도자 족속입니다.  모두가 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손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왕, 제사장, 바리세인, 서기관, 랍비들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러한 직책들은 예수를 죽인 자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통곡하며 회개 할 날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Trumph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손에 미국을 맡기십니다.  그가 실수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손에 맡기신 일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수하지 아니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1장 -우리의 미래와 희망

오늘이 투표하는 날입니다.  교회 오기전 새벽 6시에 이미 긴 줄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입니다.  그들을 유대인들을 다윗보다 귀한 인물로 다윗 족속은 유대인을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적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희망과 긍정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희망과 긍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Trump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대통령을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원하지 아니하시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 나라와  정치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할 수 있는 대통령은 결코 탄생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기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막연한 긍정입니다.

대통령은 그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이러한 예를 Abraham Lincoln을 예로 듭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노예 해방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나타납니다.  노예해방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정치적 생존의 방법으로 노예 제도를 찬성과 반대합니다.  Lincoln이 독실한 신자로 그의 인생과 정치적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당시 미국을 지배하던 이신론자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신론은 성경보다 자연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 자연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부속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의 노예 해방도 자연적 이신론의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정치인은 누구입니까?  대통령으로 선서 할 대에 성경에 손을 얹고 국가와 민족을 희생하겟다는 정치인입니다.   이러한 정치인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직책과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미래에 대한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 안에서 희망과 긍정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느 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중요합니ek.

스가랴 11장 건강식품 -불량식품

우리는 이런 말을종종 듣습니다.  불량식품이 맛이 있다고 합니다.   건강식품이 몸에 좋은 줄 알지만 대체적으로 맛이 없어 잘 먹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어려움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해악스러운 것은 대체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눈 앞에 이익과 즐거움을 선택하다가 멀리보지 못해서 손해와 고통을 당합니다.

본몬에 선한 선지자와 악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유대가 심판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악한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악한 선지자를 좋아합니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선지자는 그들을 잡아 먹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을 죽이는 선지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선지자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선한 선지자는 배척을 받습니다.  조롱을 받습니다.  그들이 선지자 노릇 한 대가로 성전에서 은 삼십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 돈을 토기장이 밭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로 유다에게 배신 당하고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받은 돈의 액수입니다.  하나님이 은 삼십을 버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유대인들과 은총과 연합의 관계를 끓으십니다.  그리고 유대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고 십자가로 연합을 하십니다.  은총과 연합의 작대기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작대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불량식품을 좋아하고 건강식품을 싫어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지만 우리는 악한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선한 선지자의 말을 거부합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악한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를 불량식품을 먹습니다.

어제 한국의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최순실과의 관계를 인정했습니다.  어려웠을 때에 최순실에게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알수 없지만 신문의 내용을 보니 장차 대한민국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여왕이 되는 것은 듣기 좋은 말입니다.  이러한 말을 싫어 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선한 선지자는 여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왕의 자질과 태도을 말합니다.  백성을 위하여 여왕이 되려면 백성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라고 말을 하는 것이 선한 선지자입니다.

선한 선지자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건강식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좋은 식사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10장 하나님의 음성 듣기

본문은 미래에 유대에게 주어질 승리와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어떻게 현실은 비극인데, 미래를 희망으로 볼 수 있습니까?  현실은 고통인데, 현재에 감사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2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정한 사람이 될까요?  누가 행복한 사람이 될까요?

우리들이 듣는 것을 듣고 보는 것을 보면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깊이 생각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너무나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아니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지금 나에게 엄청난 고민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현실과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과 상황과 싸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싸우고 자식과 싸우고, 돈과 싸우고, 나의 당면한 문제와 싸웁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나와 나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는 동굴에서 자신과 싸웠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자신과 싸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자식들의 골육상쟁과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고 왕이되려는 아들을 보면서 자신과 싸웠습니다.

이렇게 싸울 때에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포착하고 듣고,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순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듣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상황과 현실에 속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과 세상의 것이 나타나지 아니 할 때에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들리지 아니하는 음성을 듣고, 이세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광야의 고독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출애굽의 지도자가 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식들의 골육상쟁과 자식의 배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그러나 들을 것을 듣고, 볼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들을 것을 듣지 아니하고 볼 것을 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