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9장 9-17절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기다리며

오늘 본문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냅니다.

(v.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내용은 사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줄 영광과 승리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v.6-7)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슥7)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유대인의 평생 원수 블레셋이 유대인인과 같이 되고 유대인의 지도자가 됩니다.  에그론도 블레셋 민족의 하나이지만 여부스와 같이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여부스는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일부로 인정 받던 종족입니다.  블레셋을 유대인과 같이 받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내용입니다.  유대의 철천지 원수들이 유대인과 같이 됩니다.

(v.13)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이 예언은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아니하는 헬라를 사용합니다.  다니엘도 헬라를 사용합니다.  다니엘의 헬라는 그리스의 Alexander 대왕의 페르시아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입니다.  유대 말기의 예언입니다.  바벨론에게 유대가 망하면서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성전에 있던 성경들도 파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 시킵니다.  페르시아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하여 바벨론 포로들은 70년 후에 해방이 됩니다.  이번에는 그리스 // Hella의 Alexander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Alexander는 유대와 이집트, 인도까지 정복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은 성경 복사와 성경 재건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  성경을 복사하는 작업을 할 때에는 그들은 아마도 헬라의 식민지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이 블레셋이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고 헬라가 자신들에 의하여 망한다는 내용을 결코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내용을 수용합니다.  Alexander의 종교적 관용 정책에 따라 지역마다 회당 예배는 드렸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히브리 성경 원본도 같이 파괴 되었기에 성경 복사의 원본은 바벨론 포로들이 갖고 온 것을 사용 했을 것입니다.

회당 마다 성경을 복사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반드시 성경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에 성경을 제단 중앙에서 꺼내어 성경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두고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임재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성경 Torah을 의자에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논 의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식민지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Messiah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던 세상과 100% 다른 세상을 알려주십니다.  헬라가 그들에 의하여 정복 당하고, 블레셋이 유대인과 같이 됩니다.

스가랴도 모든 예언서의 전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죄에서 구원을 위하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동시에 모든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이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블레셋과 헬라는 이방인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됐고, 하나님은 그들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통치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의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거나 한국의 정치는 우리들이 세상의 식민지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자들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내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막연하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성경을 복사하던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복사는 율법에 따라 정결한 동물의 가죽만 사용했습니다.

글자의 숫자를 문단에 따라 제한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글짜가 나오면 다른 펜으로 쓰거나 다시 목욕을 하고 와서 써야 합니다.

성경 복사에 참여하는 자는 항상 정결 예식을 거쳐야 합니다.  항상 같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복사를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원본을 읽고 써야 합니다.  만일 글자라도 잘못 되었거나 그 가죽 전체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검사하다가 잘못된 곳이 3군데 나오면 그 성경 전체를 파기했습니다.

성경을 복사 할 때에는 왕이 들어와도, 적이 죽이려고 해도 성경을 바라보지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수많은 규정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대는 희망의 시대임을 확신합니다.

 

스가랴 9장 1-9 ( 최순실)

오늘 본문은 유대를 괴롭힌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교회에 고통을 준자들 이방나다들 같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지난 몇 주간 조국이 격은 수치와 참담함은 말로 못합니다.  우리의 실망과 분노는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답답한 것은 종교계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특히 기독교는 아주 조용합니다.  물론 몇 사람이 모여서 뭐라고 발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의 소리에 전혀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들이 말을 하지만 세상은 듣지 않습니다.

종교는 2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 기능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와 기도의 생활입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개인적 신앙은 한 개인의 인격과 주변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럼으로 교회라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예배와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근거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둘째는 종교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모임인 교회와 교계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윤리성과 도덕성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정치성과 사회성과 윤리성이 세상의 가치와 판단보다 우위를 가질 때에 종교는 순기능을 합니다.  세상의 윤리성과 정치성에 미치지 못하는 저급이면 종교는 역기능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그 종교는 사회의 해악스러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회적 처벌과 처단을 받습니다.

이러한 역기능의 예가 러시아의 공산혁명입니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모든 교회당을 러시아 알파벳 순으로 파괴합니다.  죵교가 사회적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집니다.

그러나 종교가 순기능의 역활도 합니다.  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입니다.  Catholic이 사회적 역기능을 나타날 때에 종교 개혁은 유럽을 변화시킵니다.  사실 오늘 날의 유럽의 정신과 문화의 중심에는 종교 개혁이 있습니다.  또한 Catholic도 Counter Reformation을 합니다.  Catholic도자체 종교 개혁을 합니다.  순기능은 또 하나의 순기능을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실력이 이러한 개혁을 만들어 낼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과 우리들의 종교적 기능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종교가 갖는 사회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책임합니다.  우리의 정치성, 도덕성 윤리성은 이미 바닥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개인적 신앙을 세상에 설명 할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을 세상에 설명 한다는 것은 나에게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모습은 우리끼리 교회 안에서, 또는 우리를 알지 못하는 선교지에서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나의 직장에서 친구에게, 세상에는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세상은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마귀의 세상, 또는 세상이 우리를 탄압한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잘못된 이유는 청와대와 똑같습니다.  종교적 세뇌입니다.  이유는 우리끼리,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 망하든 상관 없습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악용합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공공성, 윤리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청와대에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안에 최순실과 같은 종교적 마력에 세뇌되고 놀아 났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스가랴 8장 (종교가 아닌 인격의 하나님)

스가랴 8장은 모든 예언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유대를 포로에서 해방 시킨 이후에 일어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유대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날 미래적 예언입니다.  타종교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불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종교입니다.  우리의 문화와 정신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뿐 만 아니라 일본도 불교가 일본 자체의 종교로 발달했습니다.  불교는 오랜 시간동안 각 민족과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도의 불교와 우리의 불교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기독교가 우리 민족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가 입니다.  기독교의 국가들이 전쟁과 역사적 사건으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종교가 바뀐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럽이 과거에 기독교 국가였지만 점차로 기독교 국가의 정신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기독교의 종교성이 타 종교, 불교나 이슬람에 비해서 낮다고 말 합니다.

맞습니다.  종교성은 낮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신앙의 하나님입니다.  믿음, 신뢰의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관념적입니다.  자연적입니다.  즉 나의 정신적 개념에 머무는 종교입니다.  개념과 관념과 묵상과 수련의 종교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종교 생활합니다.  기독교가 신앙 이 아닌 종교가 됐습니다.  종교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증거는 자신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바리세인 사두개인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의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이 벌주시고, 상주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한 국가와 민족을 선택 할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회복시키십니다.  그 결과 우리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광, 에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종교성의 하나님,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7장 (용서 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지만 용서할 수 없기에 내 자신이 고통을 당 합니다.  또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용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낸다는 것도 지독한 고통이 됩니다.  그럼으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했다고 시인하지 아니했는데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나에게 용서의 준비가 없을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하지만 그 진의를 알 수 없을 때에도 오히려 내가 농락 당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밧세바와 간음과 우리아 장군의 살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건으로 자식들이 죽어가는 골육상쟁을 죄의 대가로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 하셨지만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죄악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하시지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죄의 용서를 믿는 자는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죄의 용서를 믿지 아니하면 결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용서 하는 것은 신자의 덕목이지만,  우리 자신이 용서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용서 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상대방은 용서 받을 자격도 갖추어야 합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리오 왕입니다.  바벨론의 포로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파괴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죄가 용서되는 길은 선행입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선행입니다.  선행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의 용서의 제사가 막힌 유대인의 죄가 용서 되는 길은 선행과 구제와 이웃에 대한 돌봄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물론 사회 정의, 공평한 재판과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어야 하지만 그 배경은 죄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유대인들이 택하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기에 선행과 구제로 그들의 죄의 용서를 간구합니다.  10월과 11월은 유대인들의 회개와 죄의 용서의 절기이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제사장과 성전이 없기에 실질적 용서는 막혀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선행과 구제를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금강석 같다고 합니다.  위선의 행동입니다.  용서를 빈다고 금식하지만 금식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는 금식이라고 합니다.

용서를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대방을 용서 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나의 마음의 분노는 가라 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나의 용서가 없다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을 정리하고 가라 앉힐 때에 타인에 대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나의 마음의 불길을 잡아야 합니다.  그 불이 나를 태워 죽일 수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6장 9-15절 (현상과 본질에서 고민)

스가랴서에 두 명의 도비야가 나타납니다.  한명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해하는 도비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공사를 훼방하는 도비야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4개의 뿔로 도비야 산발랏 게셈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 공사를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또 하나의 도비야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의 도비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헌신의 도비야입니다.

두 명의 도비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성전을 방해하는 도비야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과 고집과 생각으로 나타나는 우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의 자녀와 자신의 자녀들과 혼사관계를 맺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을 했고 유대의 제사장들은 그에게 성전의 방을 하나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을 반대합니다.

성전을 짓는 도비야의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짓습니다.

오늘 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몸을 성전을 훼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도비야는 선한 도비야의 성전 공사를 방해합니다.  자신의 정당하다고 하면서 선한 도비야를 부당하게 만듭니다.  나는 정당하고 너는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몸, 예수 그리스도를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현상과 본질이 있습니다.  현상은 역사와 상황에 따라 변질됩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여성의 낙태문제입니다.  보수 기독교, Catholic은 낙태 문제를 본질로 봅니다.  본질로 볼 때에 Hillary는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살인마입니다.  그러기에 살인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술 취한 아저씨 Trumph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과 선택을 강조하는 Pro-choice와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Hiliary을 지지합니다.  이것으로 기독교도 서로 갈등 합니다.  문제는 Hillary을 지지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진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보와 보수조차 신학적으로 구별 못하는 무지의 무식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현상과 본질에서 우리들이 갈등 할 때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상황윤리입니다.  상황윤리는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상황윤리는 전쟁에 나간 군인은 적을 죽이는 살인을 해야합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병명을 거짓으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구해주려고 거짓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적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 할 수 없는 공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전쟁에 나가 군인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의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적들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이 전쟁에 나가면 적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미국의 신자들이 중동에서 적들을 죽이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아니하려면 오늘 날의 Amish, Mennonite가 되어 세상과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떠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되면 그 현상은 Pedagogy가 됩니다.   Catholic에서 낙태는 중요한 교회의 교리로 교육을 시킵니다.  사회적 현상은 종교적 이념으로 교육이 됩니다.  이것이 Pedagogy입니다.  현상이 교육되면 교리가 됩니다.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교조화 됩니다.  Dogma // 도그마가 됩니다.  도그마는 그드들의 신앙의 정체성이 됩니다.  도그마 // Dogma가 되면 우상이 됩니다.   도그마는 성경보다 강한 힘을 갖습니다.  교리가 철저하게 교육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사라집니다.  인간의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집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는 도그마로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십자군의 도그마로 수천만을 죽였습니다.  도그마로 유대인 6백만을 학살햇습니다.  도그마로 미국의 노예제도는 성경적으로 정당화됩니다.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가 있습니다.

도그마가 잘못되면 우상입니다.  그 Dogma는  더 무서운 죄악을 만들어 버립니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죄악을 상대화시킵니다.  Trumph의 탈세, 여성문제는 Hillary의 낙태, e-mail문제보다 별것이 아닙니다.  도그마화된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죄악에도 작은 죄 큰 죄가 있습니다.  여성의 추행은 참아도 낙태는 참지 못합니다.  죄가 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결코 본질과 현상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에서 고민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6장 1-8 (일곱번째 환상-오늘의 환상)

스가랴는 7 번째의 환상을 봅니다.  4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가 나타납니다.  전차는 영어로 Chariot 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 있습니다.  메르카바입니다.  오늘 날 이스라엘에 자랑하는 최고의 탱크입니다.

또한 말들이 이러한 전차를 이끌고 있습니다.  유대지역은 말을 사육하지 않습니다.  말은 애굽과 이방 나라의 수입품입니다.  성경은 말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말을 키우려면 이방의 조련사들을 함께 데리고 와야 했으며 그들에 의하여 이방 종교가 유입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세상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방법의 하나가 세상의 많은 나라들을 이스라엘과 유대를 구하는 방법으로도 사용하시지만 동시에 이러한 나라들을 유대를 징계하시는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4개의 병거로 세상의 나라들을 처벌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구원의 전 단계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 결과 8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되었던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자신들이 사용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국력이 약했기에 이방 나라들에게 공격과 수난을 당했다고 똑같이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을 갖는 사람은 다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선거, 한국의 정치와 경제, 중동에서 IS와의 전쟁은 우리 시각에는 한 국가의 정치와 경제이고 국가와 국가의 대립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사건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이 시대의 환상이며 예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현재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미국의 선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가 입니다.  Hillary와 Trumph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환상과 예언입니까?

우리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둘 중의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치인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 할 뿐입니다.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속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 할 뿐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유럽의 정치 역사는 하나님을 이용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형태에서 벗어나려면 다음과 같이 행동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현실이 동질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과 교회 생활의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거룩하기에 우리들이 거룩해야합니다.

또한 이 시대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내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인내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깊은 묵상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5장 5-11 (우리와 같으신 하나님)

어제에 이어 또 하나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양탄자가나타납니다.  이 두루마리는 십계명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선한것과 악한 것이 공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한 것이 좋다는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것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황윤리가 나타납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은 상대방을 죽여야 자신이 삽니다.  의사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적에게 거짓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십계명이 대립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상황에 따라 살 때에 십계명과 대치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들이 얼마든지 확대해석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확대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화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어진 상황에서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오늘의 환상은 이러한 상황이 제게되는 것입니다.  악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 11절의 말씀은 그 악을 납으로 밀봉해서 두 명의 천사가  시날 땅으로 옮겨가야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던 우상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핵석 할 수 있습니다.

6장의 환상은 우리에게 주어질 승리와 영광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첫 번 단계가 악의 제거입니다.  우리들이 상황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되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주어진 상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됐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죄인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의인입니다.  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군인으로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상황에 놓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군인이기에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적을 죽여야 우리의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적도 우리를 죽여야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킵니다.  적도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적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 수 없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려고 적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을 죽일 것인지 내가 죽을 것인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만난 예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아파하고 고통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수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닙니다.

 

스가랴 5장 1-4절 (예수 없는 시대)

또 하나의 환상이 나타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양탄자와 같이 하늘에서 날아다닙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가죽에 기록했기에 넓은 양탄자와 같습니다.  1절에서 Flying scroll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심판이 나타납니다.

날아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은 십계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도적질하는 자들과 맹세하는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들은 5-10 계명을 위반하는 자들입니다.  도적질을 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도적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자들입니다.

또한 맹세하는 자들은 1-4 계명을 위반한 자들입니다.  언약의 약속을 무시한 자들입니다.

  (v.4)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십계명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6장 마지막 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구약의 시대에 십계명의 심판에서 어떻게 벗어나는 가를 6장에서 설명합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스가랴4장 1-14절 (머릿돌-철학적 하나님의 증명)

미국의 철학자의 약 1/3이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철학이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으로 부정했지만 이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철학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증명합니다.  제가 한 가지 추측을 한다면 기독교도 고도의 지식과 이성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믿는다는 단순 논리로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적 변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과거에는 우리들이 철학과 과학으로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에 철학으로 과학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시대에 고도의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3 차원의 프린터는 우리들이 꿈꾸던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영역은 우리 신체의 장애와 불구를 거의 정상인에 가깝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될 수록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인지하거나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는 고도의 기술과 인공지능의 영향과 지배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정신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초월의 영역의 필요하다고 합니다.  신비와 기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제가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변경하면 이 시대는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것을 철학적으로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이  앨빈 플랜팅가 Alvin Plantinga 입니다.   앨빈 플랜팅가 Alvin Plantinga는 미국의 철학자로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증명합니다.  그의 철학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상입니다.  상식입니다.  지극히 정신적으로 자연스러운 활동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역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v.1) 잠자는 스가랴를 깨우시며 (v.2) 무엇을 보느냐고 묻습니다.  잠자는 자를 깨웁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은 관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은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7 가지의 순금 촛대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나무 가지를 상징합니다.  Menorah 라고 합니다.  스가랴는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지만, 무엇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성전을 누가 짓고 있는가를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제사장 여호수아, 학개, 스룹바벨등이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6절에서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짓는다고 하십니다.

(v.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이 성전을 완벽하게 세우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람이 세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빌리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힘은 절대로 아닙니다.

(v.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의 마지막, 머릿돌, Top Stone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 놓을 때에 성전 공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었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머릿돌은 사람이 올려 놓습니다.   사람이 일하지만, 하나님의 허락으로 성전 공사를 합니다.

(v.14) 기름에 발리 운 두 사람이,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이들 머리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구별해서 세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목동들은 제물로 쓸 양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구별을 합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구별 된 자 거룩한 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를 세우는데 우리와 같이 구별된자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을 변증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증명을 해야 이 시대를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증과 증명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변증의 시작을 갖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철학적 변증서입니다.  Apologia 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과 요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변증을 알려 주십니다.

(v.12) 금 기름이 흘러나와 금등대의 등불을 밝힙니다.  성전의 거룩한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를 연자방아에 짓이겨 깨진 것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부숴져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나의 죄가 부서져야 회개의 기름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용서를 받는 기쁨의 기름이 나와야 하고 그 용서함 받은 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인생을 새롭게 살겠다는 결단의 기름이 나와야 합니다.

성전의 기름이 되려면 빻아낸 감람유에서 찌꺼기가 가라앉아야 합니다.  찌꺼기가 있는 기름은 태울 때에 소리가 나며 그을림이 생깁니다. 금 등대에서 사용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의 마음과 정신을 정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적 정리, 철학적 정리를 요구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변명, 변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신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철학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인정하고 우리들이 회개해서, 우리 자신을 변명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스가랴 3장 6-10 (하나님의 가면)

본문은 해석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내용입니다.  8절의 종과 순 때문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My servant, the Branch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라고 합니다.  또한 9절의 There are seven eyes on that one stone.  한 돌에 일곱 개의 눈이 있는 것이 문장의 내용으로 볼 때에 메시야 라고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문장 내용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너무나 신적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우리들이 평소에 성경을 보면서 이해 할 수 없었던 내용이 또 하나 나타납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말을 합니다.  The angel of the Lord입니다.  천사입니다.  Hebrew로 Malak입니다.  천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왕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9절과 10절에서 천사가 하나님으로 변합니다.  says the Lord Almighty 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창세기 18장에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가는 3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을 잘 대접하는데 19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18장에서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람-천사-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독일 루터교 신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실천 교리가 있습니다.  Martin Luther에 의해 주장 된 하나님의 가면입니다.  하나님은 가면을 쓰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19장에서 천사가 롯에게 나타나지만 18장과 다릅니다.  롯에게 천사로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로 나타나지,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면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그의 많은 예화는 하나님의 가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어떻게 대접 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유대적 배경입니다.  십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부터 경솔하게 부를 수 없기에 천사로 호칭하지만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Malak이 천사도 되지만 왕도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가면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가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 끝이 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아마 제가 이번 주일에 하나님의 가면을 설교 할 것입니다.  좋은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