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2장 – 인간과 하나님의 역사관

스바냐 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악을 징계 하실 때에, 이방의 나라들을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십니다.  이집트, 구스, 블레렛, 앗수르, 바벨론, 모압, 암몬등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매와 채찍을 맞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들이, 공격합니다.  전쟁에서 패배를 당하면 포로로 끌려가고, 지배를 당합니다.  공격을 하는 나라들은 약한 나라를 지배하려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공격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해서 적에게 지배를 당합니다.

인간의 전쟁이고, 인간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치 임진왜란과 같습니다.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합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임진왜란을 하나님의 우리 나라를 우상숭배로 일본을 사용하셨기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전쟁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으로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전쟁 역사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각 개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성공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패와 성공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엄청난 역사관의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Post-modernism에서 사람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개념의 주류입니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상황적 가치가 중요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개인이 역사적 주체가 됩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허구적 사실로, Fiction, 이야기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은 인정 받을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은 사람의 역사관과 하나님의 역사관을 대립적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추신: 김 장로님의 모든 장례 순서를 잘 마쳤습니다.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스바냐 1장- 여호와의 날 -헤렘

스바냐의 특징은 하나님의 날에 대한 자세한 내용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을 공부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단어가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요엘등, 모든 예언서에 여호와의 날이 새롭게 이해됩니다.

예언서 이전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언서에 들어와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의 날로 나타납니다.

제사가 심판으로 변경되는 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구원이, 찬양이, 감사의 여호와의 날이 , 죽음과 고난과 시련으로 변경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예언서의 여호와의 날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달라졌지만, 하나님에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히브리어로 헤렘 // Herem이 있습니다.  완전히 박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유대인들이 전쟁에 언약궤를 끌고 나가는 이유의 하나는 전쟁에서 이기려고 끌고 가는 것이지만 근본적 의미는 제사입니다.  적들을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한 제사는 고대 전쟁사에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 성의 전쟁에서 아간이 하나님의 제물을 탈취합니다.  그 결과 아이성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배합니다.  여리고의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입니다.  헤렘입니다.  모든 것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제물로 드리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우상숭배에 오염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벌 전쟁도 헤렘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부족을 살려 두었을 때에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헤렘의 제사와 제물을 훔친 유대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것이 이방국가입니다.  이사야가 이러한 헤렘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 바벨론이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헤렘의 제사를 거역한 유대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언서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적들에 의하여 유대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변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 이해하는 멍청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이해하면 우리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 예배를 훔치는 자는 징벌하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나 모든 날을 하나님의 날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 자는 하나님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제사, 제물을 훔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원입니다.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사 // 헤렘을 훔친자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에게 심판을 당합니다.

오늘 날 잘못된 종말론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로 종말의 날에, 여호와의 날에 믿는자들도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고 합니다. 스바냐 3장에서 이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여호와의 날이기에 감사와 은혜의 하루입니다.  좋은 날이 되길 바랍니다.

 

하박국 3장-하루의 선택

본문은 하박국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심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에서 하바국은 감사합니다.

감사 할 것이 있어서 감사하다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사회적인 윤리성를 갖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에서 신앙적 감사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부모에게 감사 합니다.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감사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감사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면 신앙적 감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감사의 상대가 변화합니다.  부모가 인간적 대상에서 신앙적 대상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윤리성과 도덕성에서 신앙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하나님은 이방민족이라는 몽둥이와 채찍으로 하박국과 유대를 때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바국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간과 하는 것은 하박국의 감사가 윤리성과 도덕성의 단계를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1장에서 하박국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이 2장에서 믿음으로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들은 하박국은 3장에서 신앙적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감사 할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 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고 있느냐 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우리 문제의 해결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면 그 믿음은 조건부적입니다.  조건은 우리를 윤리성과 도덕성에 머물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것은 이미 2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은혜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오늘 날 수많은 신자들이 은혜의 대한 이해가 너무나 명목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수없이 외치며 믿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조건부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은혜라고 합니다.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은혜는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은혜와 감사와 기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만, 시련과 고통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하박국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믿음으로 살지만 우리는 매우 무능력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시련과 고난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것이 윤리성, 도덕성에서 종교성입니다.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짧은 말씀에 6 번의 없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완전히 빼앗긴 상태입니다.  정말로 감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사합니다.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즐거워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극과 극이 갈라집니다.  하루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이 나타납니다.  

예수로 살 것인가?  주어진 환경에서 따라 살 것인가?  하루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박국 2장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1장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질문과 의심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의심과 질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2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사람을 2 가지로 나눕니다.

(v.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음이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같은 자입니다.  그에 대한 모습을 1-19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믿음이 없는 자에 대한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의 근간을 이룹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믿음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입니다.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전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의지나 사고나, 행동이나, 실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100% 하나님의 은총적 의지입니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는 현재, 수동태입니다.  진행형으로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오늘도 주십니다.  평생 예수를 믿어도 성령 하나님은 믿음을 오늘 주십니다.  1초 전에 예수를 믿어도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자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잘 예를 드는 것이 히브리서 11장과 12장입니다.  11장의 믿음과 12장의 믿음은 서로 다른 믿음입니다.  11장의 믿음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입니다.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한 믿음입니다.  12장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약속과 증거를 받은 믿음입니다.

한국 교회의 믿음의 설명에서 가장 치명적 실수는 11장 1-2절을 믿음의 정의로 설명하고 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전자의 믿음입니다.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이 주어지지 않은 믿음을 믿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을 믿음의 표본을 설교합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믿음에 대한 엄청난 혼란을 불러옵니다.  믿음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신앙의 선배들이 아닙니다.

12장이 바울이 말하는 후자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의 특징은 고난과 핍박에서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들은 악한 것들이 선한 것을 죽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신자들을 악의 손에서 구해주시지 아니하는 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히브리서 12장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히브리서 12장에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히 12:27-28)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v.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이것이 후자의 믿음입니다.  이렇게 의심과 고난에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광과 승리는 종말에 나타남을 히브리서는 증거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믿음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현실의 어떠한 문제의 해결이 아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는 종말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일한 내용이 하박국 2장 3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최후의 승리의 약속과 증거를 받았습니다.  신자의 오늘의 삶은 고난과 시련과 징계와 의심에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믿음을 개선 발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세상에 대한 통치를 확인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박국 3장에서 하박국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이해가 됩니다.

 

 

 

 

나훔 3장- 오늘의 지옥

모든 삶에는 시작과 마지막이 있습니다.  나훔 3장은 이러한 마지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이 너무나 살벌합니다.  그 이유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지막에 대한 소식을 언론과 사람을 통해서 듣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들입니다.  미국에서 총기사건의 희생자, 폭력과 범죄에 의한 마지막, 비극적인 사고, 질병에 의한 죽음, 시리아에서 일어나는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지막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우리 마음도 덧붙여 봅니다.

나훔 3장 하나님의 심판이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더 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천국을 소망하기에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어가며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이렇게도 변형 할 수 있습니다.  죽음 뒤에는 지옥이 있기에, 우리들이, 이 땅에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도래한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어두운 내용과 삶을 보고 지옥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포탄에 맞아 손으로 무표정하게 피를 흘리는 얼굴을 닦는  5살의 아이는, 이 시대의 사악함과 잔악을 나타냅니다.  그 아이의 형은 병원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러한 세상을 보고도, 지옥이 없다고 하면 그는 짐승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이 마비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 천국 지옥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불과 48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그 형제가 죽고, 피흘린 자리에 또 다른 아이를 죽입니다.

비극적 죽음을 보고, 다시 그 자리에 죽고 죽이는 인간에게 심판이 없을까요?  이러한 상황을 강 건너 불 구경으로 바라보는 우리는 책임이 없습니까?  사실 책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주변이 지옥과 같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변명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절망과 아픔이 연상됩니다.  그들의 변명이 우리의 변명과 똑같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변명과 절망에 있기를 간구합니다.

 

 

나훔 2장-나무와 산의 통합에서 통전으로

우리들은 사물을 볼 때에 2 가지 시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가장 잘 인용하는 내용인데, 어떤 사람은 산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나무를 봅니다.  2 가지 서로 시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합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산과 나무를 통합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통합적 시각입니다.  산과 나무를 동시적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가능 할 수 있지만, 사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산과 나무는 서로 다른 주체입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산은 산이고 나무는 나무입니다.  우리들이 산과 나무를 통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와 남편의 의견이 다릅니다.  아내는 나무를 볼 수 있고, 남편은 산을 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서로의 의견이 산과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통합해서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보자고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통합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한국의 THAAD 배치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국제적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IS에 대한 격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 러시아, 시리아, 터기, 쿠르드족은 IS의 격퇴보다 자국의 이익이 먼저입니다.  IS가 각국의 필요 악입니다.  IS 퇴치를 위해서 이러한 나라들은 절대로 통합 할 수 없습니다.  IS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모든 나라에게 독이 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합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신의 유익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이 있기에 절대로 통합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양자가 동시적으로 포기하면 통합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일방적 통합, 흡수 통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치적 용어로 통일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이익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내가 통합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역사의 교훈은 통합의 주체가 힘이 약화되면 다른 것에 또 통합을 당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앗수르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이사야등 다른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은 앗수르를 북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유대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앗수르를 유대와 북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심판을 해서 사라지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나무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고난과 죽음을 준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산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은 앗수르를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하시고 쓸모가 없어 버리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합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의 통합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죄도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죄도 징계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시지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나훔의 의미는 Hebrew로 위로, 위로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위로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유대, 앗스르 바벨론, 중국, 대한민국, IS,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에는 앗수르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류의 구원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통합, Unification이 아니라 통전입니다.  Wholistic 또는 Holistic입니다.  전체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온전해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온전해집니다.  우리는 통일에서 통전으로 나가야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직장이, 조국이, 세계가, Unification되는 것이 아닙니다.  Wholistic, Holistic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될 때에 로마서의 말씀처럼 나무가 온전해집니다.  산이 온전해집니다.  우리의 죄악을 알고,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확신 할 때에, 우리 자신에게 진정한 구원이 나타납니다.  모든 인류가 십자가의 죄의 용서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가정, 직장, 대한민국, 이 세상이 온전해집니다.  산과 나무의 시각은 우리의 죄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믿어지고, 이해되고, 용서되면 우리는 산과 나무를 통전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시각은 달라집니다.

나훔 1장-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일관성이 있으신가?

공평과 일관성은 우리들이 어떠한 일을 판단하는 근거가 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공평하거나 일관성을 갖지 아니 하면 우리는 그를 신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당하거나 일관성을 갖지 아니하신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결정적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훔입니다.  나훔, 전장이 미가서이고, 그리고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요나의 태도의 반발과 실망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미가서를 지나면 나훔인데 내용이 아주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대한 심판과 분노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에게 공평성과 일관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훔의 내용은 앗수르,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저주입니다.

(v.1-2)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v.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그리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는, 요나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나훔서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니느웨는 저주와 심판을 받고 유대에는 하나님이 요나와 같은 자를 준비하십니다.  성경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철저하게 심판합니다.

(v.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유대는 철저하게 보존하고 지키십니다.  요나서와 반대입니다.

(v.15)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들에게 벌을 주시고, 세상 사람에게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세상에는 벌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공평성과 일관성을지지키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공평과 일관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 스스로에게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타나십니까?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형상을 에스겔 1장에서 하나님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에스겔 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나타나십니다.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하나님의 형상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볼 때에 오로지 한 방향의 얼굴을 봅니다.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뒤를 보면 앞을 볼 수 없습니다.  그의 왼쪽을 보면서 오른 쪽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사 복음서 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위한 복음이기에 소와 같은 율법의 하나님입니다.  마가는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기에 기적과 능력의 사자와 같은 하나님입니다.  누가는 그리스 사람을 위한 복음이기에 사람의 얼굴을 한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전체 인류에게 나타나시는 복음이기에 독수리와 같이 하늘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오늘도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하나님이 공평성과 일관성을 지키시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우리의 한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훔과 요나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과 우리 인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미가 7장 –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

중국의 고사에 왕 사냥해서 잡은 새를 신하가 죽였습니다.  당시 왕의 새를 죽이면 그 새를 돌보는 자도 죽어야 합니다.  왕이 신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헤로운 신하가 왕에게 저자를 죽이기전에 저의 죄 3가지를 알리고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다름과 같이 3가지의 죄를 고발하고 사형을 시키자고 합니다.

첫째는 왕의 새를 죽인 것이 죄라고 합니다.  둘째는 왕이 새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하는 죄라고 합니다.  셋째는 왕이 사람보다 새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신하들에게 알게 하는 죄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신하의 말을 들은 왕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사형을 중단시킵니다.

매우 지혜로운 신하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태도를 바꾼 왕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늘의 태양 아래에 서면 빛과 그림자가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긍정적 부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본문은 미가서의 마지막입니다.  미가는 히스기야가 왕일 때의 예언자입니다.  히스기야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일수 있고 매우 부정적 일 수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의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 개혁이 정치적으로 의도적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하스의 철저한 우상숭배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정치적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두려워 바벨론을 끌여 들여서 앗수르와 전쟁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강함을 바벨론에게 알려 주려고, 자신의 군대와 보물을 바벨론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선한 의도는 바벨론에게 유대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히스기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명예와 이익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의도적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새를 죽인 신하를 죽이지 않는 왕도 자신의  명예와 이익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의도적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신하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벌과 회개입니다.  미가는 7장에서 유대의 죄악을 철저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대를 바벨론 포로의  사건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7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게하십니다.

이러한 사건은 이렇게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서 구원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하십니다.

미가는 이러한 하나님을 이렇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v.18-20)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v.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v.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하나님과 같은 신, 하나님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에서 벗어나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아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소연

미가 6장은 하나님이 자연계를 증인으로 세워서, 법정에서 우리를 고발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소연을 하십니다.

(v.1-2)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v.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우리들이 우리 주변의 산과 강물에게 우리의 당당함을 호소 할 수 있을까요?  하늘을 바라보며 부끄럽지 아니하고, 땅을 바라보며 나를 자랑 할 수 있고,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며 나의 성실함을 비교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를 품고 있는 땅을 보며, 나의 주변에 만발하는 꽃과 나무를 보며, 높은 산과 말 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눈물과 아픔도 있지만, 기쁨과 행복도 있습니다.  사람만이 갖는 지식과 지혜와 사랑을 갖고 살아갑니다.

나라는 존재가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미약한 어린 아이에서 성숙하고 지혜로운 노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내 안의 욕심과 부정한 것과 끝없이 싸우는 우리들입니다.  정의와 선을 추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실망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v.14-15)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v.15)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표현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를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늘과 땅과 꽃과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자연을 지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연들이 우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를 위로했고,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연계에 하나님의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숨을 쉽니다.  자연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더 이상 불평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빈약함과 허망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소연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위로와 아픔이 나타납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관심을 갖습니까?  하나님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보면, 오히려 크신 위로가 찾아옵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지는 자연과 하나님에게 만족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미가서 5장- 참 목자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참 예언자 거짓 예언자를 비교 했습니다.  우리사이에 거짓과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실도 완벽한, 절대적 진실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참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참은 완벽한 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당시의 교회를, 왕권을 가장 신랄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는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당시 Catholic 교회와 결탁한 왕권을 철저하게 증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정치력을 줄 때에 나타나는 폭력과 혁명을 누구보다 두려워했습니다.  차라리 왕과 백성이 어느 정도의 권력을 나누는 것이 서로 공생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볼테르는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타락과 백성들을 착취했지만, 교회마져도 없다면 사람들의 영원성과 높은 지성적 탐구의 상실을 염려했습니다.

볼테르는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어야 한다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야하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 사람으로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으로 가장 고상한 행동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의 예배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신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 신을 잘못 이해한 교회와 신자를 조롱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날 교인들과 교회는 절대적 가치와 신념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포스트 모던은 절대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분화되어 상대적입니다.  그럼으로 앞으로 반세기 정도 인류는 엄청난 사상의 혼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절대적 삼각형에 상대적 사각형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수많은 수정주의적 태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절대적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v.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인용됩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 태초라고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예수님입니다.

  (v.4)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4절에서 그는 우리의 목자라고 하십니다.  미가는 1-4장 까지 가짜 목자, 참 목자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짜와 가짜라고 비닌하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진짜 신자, 진짜 교회, 진짜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볼테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수정주의적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현실입니다.  그러나 참목사는 예수님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참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때까지 부족한 우리는 이성과 지성과 영성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뜻을 최대한도로 찾아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대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볼테르와 같이 신이 없다면 신을 만들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영원성에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에 예민성과 감각성을 을 갖추려면 기도와 예배에 치중해야합니다.

이렇게 혼란한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빛과 길로 인도해주실 것을 간절히 믿고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