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신문에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연구 결과는 Coffee는 골다공증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논쟁의 하나는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는 계란 노른자보다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쁘다고 합니다. 노른자가 Cholesterol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나의 진실이 너에게는 진실이 아닙니다. 너의 진실이 나에는 진실이 아닙니다. 헤겔 (Hegel)은 이러한 반복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합니다.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Hegel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칼 마르크스 (Karl Marcus)는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계급투쟁은 지극히 당연하게 됩니다. 전쟁과 죽음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진실을 자신이 절대화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절대화하면 그것은 끝없는 싸움이고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소위 포스트 모던 (Post-modernism)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에 진실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회피하려면 상대방의 진실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진실이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을 관용 (Tolerance) 라고 합니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이러한 관용이 깊어지면 나의 진실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해집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물질적, 정신적인 것에 압도되면 나의 진리는 사라제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v.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매우 고민거리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수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타인을 비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하십니다.
(v.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v.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의 우리의 진리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졸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철저한 죄인에 근거한 진리성입니다. 이 시대의 교인들과 교회는 우리의 진리성은 절대화하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복음을 진리화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로만 나타납니다.
그 결과 봉은사에 가서 뺑뺑이를 돕니다. 단군상의 머리를 자릅니다. 지하철에서 마이크로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진리를 외치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우리의 진리는 나의 눈의 들보를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나의 눈의 들보를 보고, 상대방의 진리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들보를 보고 틀렸다고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진리수호로 생각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이 광란적입니다. 폭력적입니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는 것이 아니라 헤겔 (Hegel)의 역사 투쟁을 따르는 자입니다.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은지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쁜지,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들보를 봐야 합니다. 우리의 들보는 보고, 나의 진리를 주장해야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겸손과 자비와 인내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묵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