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7장- 커피와 계란의 진리

어제 신문에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연구 결과는 Coffee는 골다공증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논쟁의 하나는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는 계란 노른자보다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쁘다고 합니다.  노른자가 Cholesterol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나의 진실이 너에게는 진실이 아닙니다.   너의 진실이 나에는 진실이 아닙니다.  헤겔 (Hegel)은 이러한 반복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합니다.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Hegel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칼 마르크스 (Karl Marcus)는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계급투쟁은 지극히 당연하게 됩니다.  전쟁과 죽음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진실을 자신이 절대화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절대화하면 그것은 끝없는 싸움이고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소위 포스트 모던 (Post-modernism)입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에 진실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열을 회피하려면 상대방의 진실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진실이 인정을 받습니다.  이것을 관용 (Tolerance) 라고 합니다.  현대 사회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이러한 관용이 깊어지면 나의 진실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해집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물질적, 정신적인 것에 압도되면 나의 진리는 사라제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v.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매우 고민거리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을 수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타인을 비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하십니다.

(v.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v.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의 우리의 진리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졸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철저한 죄인에 근거한 진리성입니다.  이 시대의 교인들과 교회는 우리의 진리성은 절대화하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복음을 진리화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로만 나타납니다.

그 결과 봉은사에 가서 뺑뺑이를 돕니다.  단군상의 머리를 자릅니다.  지하철에서 마이크로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진리를 외치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우리의 진리는 나의 눈의 들보를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나의 눈의 들보를 보고, 상대방의 진리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들보를 보고 틀렸다고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진리수호로 생각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이 광란적입니다.   폭력적입니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는 것이 아니라 헤겔 (Hegel)의 역사 투쟁을 따르는 자입니다.

Coffee 1-2잔이 골다공증에 좋은지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란 노른자가 Cholesterolㅇ에 나쁜지, 달걀의 흰자가 더 몸에 나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들보를 봐야 합니다.  우리의 들보는 보고, 나의 진리를 주장해야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겸손과 자비와 인내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묵상입니다.

마태복음 7장

최근 한국에서 언론의 초점이 되는 사람이 김종인 씨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불황은 윤리로 뚫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를 경제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불황기에는 모든 경기부양을 해봤자 소용없다고 합니다.  불황일 때에 모든 경제주체들은 경제적 윤리와 도덕성을 세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정부는 불공정 규제를 제거하고 기업의 경쟁체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 윤리는 후퇴하고 불황이 심화된다고 합니다.  경제가 불황의 해결은 돈이 아니라 경제 윤리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불행과 행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와 과정은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가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성공하려면,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윤리와 도덕성을 유지해야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준다는 것은 Hella로 Didomi입니다.  Didomi의 의미는 나의 것을 너에게 준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Didomi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은 전파하는 것이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전파는 Hella로 Keruso입니다.  전령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그대로 전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나의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은 Keruso입니다.

김종인씨의 말처럼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와 도덕성이 나타나야합니다.  예수님의 진선미가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적 표현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물론 Didomi처럼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받아들여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주변에 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윤리성과 도덕성이 부족한 자신감의 결여입니다.  우리에게 진선미가 있어야 합니다.  윤리성과 도덕성을 유지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The truth 있어야 합니다.  수학적으로 맞는 것을 추구하듯이, 맞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The good 선함이 있어야 합니다.  착함과 정직함과 사랑과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The beauty미가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을 해야하고, 슬픈 것을 보고 슬프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는 마음의 성숙과 풍성함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The truth, The good, The beauty가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행복과 성공을 보장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사순절 마태 5장-진정한 영성

마태 복음 5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이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라 앉게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산상수훈을 우리의 영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적 훈련과 경험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영적 체험으로 이해합니다.

천국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100불 내기 골프를 칩니다.  돈을 걸고 치기에 누구도 양보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면서 친 첫 타가 한 번에 Hole in one이 됩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바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첫 타를 칩니다.  바울의 첫 번 타도 역시 Hole in one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예수님이 베드로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기적을 빼고 원래 실력대로 골프를 치라는 것입니다.  기적 없는 Golf가 두 사람의 진짜 실력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진정한 영성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만 기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종교에도 있습니다.  기적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매우 흐려집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난 부흥의 시대에는 반드시 이단이 나타나는 휴유증이 뒤따랐습니다.  미국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세계적 이단은 미국에서 나옵니다.  개인적 신앙의 체험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체험이 말씀으로 신학화되지 아니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v.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v.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님은 스스로 법을 폐하러 Destroy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Fulfill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파괴와 채우는 것은 반대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이 세상의 끝이 날 때까지 율법은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영성은 이러한 법을 완전케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이 시대의 상황과 역사에서 성경적으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학적 평가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영성을 갖지 못하면 산상수훈은 우리와 멀리 있습니다.

 

마태 4장 사순절

Harvard 대학에서 행복을 75년 동안 연구한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1938년에 724명의 사람들을 행복을 지금까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최장기 프로젝트의 하나입니다.

행복의 원인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인간관계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관계입니다.  결혼, 건강, 명예, 돈과 상관 없이 누군과 나와 함께 있어줄 때에 사람들은 행복을 얻었습니다.  나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의 최적의 조건이였습니다.

4장에는 예수님의 시험이 나타납니다.  또한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두 개의 사건은 아주 다른 것 같지만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신적 관계와 인간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형성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심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으로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2개로 나타납니다.  유혹은 상대방을 미혹, 또는 현혹시켜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단이 Eve을 유혹합니다.  유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잘못 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시험은 다릅니다.  시험은 상대방의 의지와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학생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합니다.  Test입니다.  시험은 고통스럽습지만, 나를 적정한 수준으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지만 사탄의 유혹으로 그 관계는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나의 현실에서, 유혹을 당하는지, 시험을 당하는지 구별을 해야합니다.  나를 시험하는 자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나를 미혹하는 자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디쓴 관계가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제자를 찾아가서 부르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제자들은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쫓은 이유는 예수님을 통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 해결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선택해서는 안 될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야망의 성취가 목적인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때에 모두가 비겁하게 도망 갈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 할 자들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은 삼십에 팔자를 찾아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관계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시고, 관계를 맺으려고 찾아가시는 관계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Harvard 대학의 발표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행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조금만 차지 않으면 관계를 파손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에 두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불행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관계가 우리의 관계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3장 사순절 -천국가는 이유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세례를 거부합니다.  요한이 세례를 거부하는 이유는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물로서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의식의 하나가 물로 씻는 것입니다.

(v.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주님은 요한에게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은 주님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렇게 세레를 베푼 후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 공통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가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마 3:1-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v.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처음 외치는 내용이 회개와 천국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처음 외치는 내용과 주님이 처음 외치는 내용이 같습니다.

같은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천국, 에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회개 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와 있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에게 폭탄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수류탄과 같습니다.  안전핀을 뽑고 4-5초 후에 던지면 폭발합니다.  그는 안전핀을 뽑은 상태입니다.  던지면 터집니다.  수류탄이 던져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폭탄이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이라고 하십니다.  공중에 폭탄이 터지기 일보직전입니다.  이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는, 나로 세상의 끝이 왔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 Chronos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Karios, 은혜의 시간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공중에 폭탄이 던져진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 폭탄이 터질 때에 자신의 생명이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많운 분들이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의롭게 여기시는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우리들이 천국가는 이유입니다.

 

마태 복음 2장 12-23절 사순절

우리는 꿈을 꿉니다.  우리들이 왜 꿈을 꾸는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Sigmund Freud와 Carl Gustav Jung은 꿈을 비현실적인 사건이 아닌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삶의 일부분으로 봅니다.  그들에게 꿈은 하나의 현실입니다.   프로이드와 같은 학자는 꿈을 통해서 그 사람의 정신을 분석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예측합니다.  우리도 꿈을 꾸면 그 꿈으로 프로이드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구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전달 매개체입니다.  요셉의 꿈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꿈에 대해 부정적이기도 합니다.  거짓 선자자의 꿈과 복술자의 해몽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신 13:1-5)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합니다. 사악한 꿈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꿈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꿈은 반드시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적 도구입니다. 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우리가 꿈에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봤다고 할지라도 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가 입니다.

(2장 :12)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꿈에 헤롯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꿈 때문에 다른 길을 갑니까?  아기 예수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까?  어느 것 때문에 다른 길로 갑니까?  외형적으로 꿈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v.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조용히 파혼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 23절을 읽으셔야 합니다.

(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이 꿈을 꿉니다.(v.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v.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v.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v.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v.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v.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꿈도 중요했지만, 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꿈대로 행동했습니다.

(v.24-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v.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옵니다. 그와 잠을 자지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행동의 연속입니다.  성경은 꿈의 중요성이 아니라 꿈에 나타난 예수를 위한 계속되는 행동입니다.

(v.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다시 요셉이 꿈을 꿉니다.  헤롯은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기를 다 죽이게 됩니다.  꿈에 애굽으로 피신을 가라고 합니다.

(v.13-b)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은 그 꿈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계속 꿈의 행동이 반복됩니다.

(v.22-23)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v.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오늘 우리들이 무슨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꿈에 보든지, 하늘의 영광에 참여했던 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행동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꿈의 해석으로 사순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태 1장 18-25 사순절-3

오늘 본문은 성령의 잉태입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육친의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  (v.20)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남자와 관계 없이 임신했습니다.  성령의 잉태는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도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간섭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시작은 절대적 은혜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과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잉태는 마리아의 공로와 의지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 성령의 잉태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잉태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심과 생각을 하게합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든 마리아는 Theotokos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을 낳은 여인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One who gave birth to God입니다.  Latin로 // Dei-para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을 낳은 여인, Maria입니다.

오늘날 Roman Catholic에서는 Theotokos에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Latin로 Dei Genitrix입니다.  번역을 하면 Mother of God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출생에서 마리아의 주도성과 의도성이 강조됩니다.  한국적 번역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당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글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오늘 본문과 비교하면 너무나 심하게 Maria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의 근원과 원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Maria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출산했지만, 그 출산의 근원과 원인은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Theotokos도 인간의 공로가 강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이러한 입장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출산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Theotokos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Theotokos가 부정되어야 할 결정적 근거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눅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자신의 몸을 빌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Maria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여종, 비천한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비천한 계집종을 하나님을 낳은 여인 이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이러한 사순절에 성령의 잉태를 묵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추신: 날이 너무나 춥습니다.  주일 예배는 아래층 큰 방에서 드립니다.  춥지 않을 것입니다.  토요 새벽기도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사순절 새벽기도-2

어제 수요일 부터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컴퓨터가 작동이 되기에 다시 새벽기도 묵상을 보내드립니다.  어제 추운 날이였지만 많은 교우들이 나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은 마태 복음을 40일 동안 나누어서 보내드리니, 마태 복음을 중심으로 40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1장 1절에서 17절의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마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는 편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첫 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둘째는 우리의 구세주이며 셋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강조를 위해서는 족보의 등장이 필수적입니다. 

유대인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v.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아주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제 어느 유대인의 집을 방문해서 오랜 동안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알 수 있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예배와 전통, 그리고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에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시작이고 다윗은 유대인들의 완성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완성을 위하여 또 다른 다윗이 나와야 합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다윗의 후손 Messiah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Messiah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은 Messiah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서 부활입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죽음에서 부활이 다시 한 번 뚜렸하게 우리에게 각인이 되면 우리는 사순절을 은혜롭게 지키는 것입니다.

(롬 4:17-24)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많은 교회가 사순절을 통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응답 받는 기간으로 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좀더 의미 있는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확신입니다.

(v.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Born을 사용하지만 아버지가 낳은 자식으로 볼 때에 Beget // Begat이 됩니다.  그런데 족보를 자세히 보시면 여자들이 나타납니다. (v.3) 다말에게서 //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다말은 창기로 가장해서 시아버지와 육체적 관계를 맺습니다.  성경이 죄악으로 여기는관계입니다.

(v.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또 하나의 여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라합이 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 창녀였습니다.

(v.5-b)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룻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룻은 구약 룻기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이방 모압 사람입니다.  이방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사람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v.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야의 아내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는 부정한 간음의 관계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기 위하여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의도적으로 죽게 합니다.

이러한 피가 예수님의 족복에 흐르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혈통으로 오셨는지 깊이 묵상하시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38장 (신자들의 부하뇌동)

에스겔 38장과 39장은 성경 해석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2-3절 때문입니다.  [겔 38:2-겔 38:3]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3)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마곡이라는 땅의 위치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마곡의 위치를 연구하지만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또 하나는 성경에 지명으로는 에스겔과 요한 계시록에 단 2번 등장합니다.  사람의 이름으로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아들 마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름과 지명을 다른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계시록의 마곡 때문입니다.  [계 20:8-계 20:9]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계시록에 근거하면 마곡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최후의 세력이 됩니다.  그 이유는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와 신자들을 괴롭히던 세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에 의하여 영원한 유황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잊지 마세요,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마곡은 구약적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적 그리스도에 의하여 조종 당하는 국가가 됩니다.  과연 어느 나라일까요?  하나님은 우라에게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을 정확하게 자세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가 최후의 심판 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는 적 그리스도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과거 공산주의가 있을 때에는 소련과 중국이라고도 했지만 공산주의는 사라졌습니다.  그럼으로 계시록에 근거해서 마곡을 자세히 보면 국가나 지명이 아닌 것으로 유추 할 수 있습니다.  [계 20:9]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곡과 마곡은 세상에 흩어져있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지역에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땅의 사방의 백성입니다.   마곡은 동서남북에 있습니다.

마곡은 사방에 있습니다.  어느 것도, 누구라도, 언제라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은 마곡이 됩니다다.  사탄, 마귀의 시험에 빠지면 마곡이 됩니다.  이 시대의 문화와 정신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아니하면 마곡이 됩니다.  마곡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 것처럼, 마곡은 우리와 가까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도 알지 못하시는 마지막 때를, 그 때를 언제라고 말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특정한 세력을, 특정한 인물을, 특정한 국가들를 민족을, 적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EU가 적그리스도이고, Obama가 적 그리스도이고, 미국이 적그리스도의 국가이고, 한국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5월이 되면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으면 최후의 심판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적 그리스도입니다.  마곡 출신입니다.  사탄과의 졸개 귀신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휘가 성령과 영적이라는 단어입니다.

미련한 신자들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의 말에 부화뇌동합니다.  이렇게 부화뇌동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원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마곡의 시험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절대적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오늘도 헛된 거짓 예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37장 15-28 (통일)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아주 휘귀한 내용입니다.  솔로몬 이후로 갈라진 남 유대와 북이스라엘의 통일을 하나님이 예언하십니다.  성경에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내용은 아주 적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남북의 통일은 바벨론 포로가 끝이 난 후에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한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 이후 더 이상의 남쪽의 유대와 북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국가로 되어 외세의 끓임 없는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2 차 세계 대전이 끝인 난 후에 단일국가로 독립한 것이 오늘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망은 예루살렘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하여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예루살렘에서 쫒겨 난 후에 예루살렘을 회복을 그들의 최대의 종교적 열망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열망의 가시적 성과는 2 차 세계 대전 이후에 팔레스틴의 아주 작은 지역 몇 군데를 차지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과거의 영토를 회복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있던 이슬람의 황금사원 건물입니다.  저도 이스라엘 2 번 가서 한 번 들어가볼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것이 생가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 사원의 자리는 유대교나, 이슬람에게는 양보 할 수 없는 자리가 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미래가 걸린 곳입니다.  유대교의 시작이 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입니다.  이슬람의 마호멧이 하늘로 승천 한 곳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갈등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거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통일하십니다.  유대인, 헬라인, 이방인 종과 주인을 하나로 통일시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허락하십니다.

구약의 성경,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가 오심으로 예루살렘은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나타납니다.  (히 11:8-16)을 보면 아브라함이 바라보던 성이, (v.16)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면에서 우리들이 태도가 좀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년에 4-5만명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갑니다.  예루살렘의 실질적 회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태도를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적 태도입니다.  구약에만 근거한 태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약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는 팔레스틴인으로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 신자가 아닙니다.  많은 한국분들은 겉 모습만 보고 이슬람으로 취급을 합니다.  성지 순레가면 많은 개신교 팔레스틴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우리의 모습은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유대교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분열을 조장하는 신자로 보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안에서 통일됩니다.  우리 조국의 통일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역사적 사건을 예수 안에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 시각은 분열이 아닌 통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