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검은 불화, 분쟁,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스스로 우리들이 기대하는 모습과 반대입니다.
(v.35-37)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v.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v.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에 나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의 인간관계가 파괴되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가족과 사업을 버리는 것이 용납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 이러한 관계를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차이 없이 변질됐습니다. Degraded 되었습니다.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종교에서 변질, 타락이 일어나면 자신들의 추악함과 죄악을 감추려고 자신들의 종교성을 강조합니다. 종교적 행위로 자신들의 타락과 진리의 왜곡을 감추게 됩니다.
진리를 상실하면 진리가 없기에 종교적 행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질타하신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이러한 현상으로 동원되는 것이 선교, 구제, 교회적 성장입니다. 또한 교인들에게는 종교적 열심의 행위가 하나님의 축복과 직결되어 있다고 속입니다. 열심을 갖지 못하면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사기 행위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사회의 정의를 감당해야할 부분이 있고, 불신자에게 대한 선교와 사회의 약자에 대한 구제적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축복해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구제, 사회정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과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과 책임으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본질입니다. 우리의 사명과 책임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역자들과 달란트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성경을 신학적 해석에 근거하면 본질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인간의 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성자 하니님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죽음에서 승리하하게 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비본질을 주장하고 교인들의 비본질을 잘 수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내용은 유대교가 하나님의 본질을 왜곡해서 비본질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분노를 이해해야합니다.
(v.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기에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날의 거짓 복음은 십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할 뿐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공덕을 쌓는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v.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제부터 목에다 십자가 걸고, 차에다 십자가 달고, 집에다 십자가를 걸어 놓았다면 십자가가의 법칙대로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고 나의 이웃 앞에서 죽어야 우리에게 부활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고 흉내라도 내는 사순절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