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8장 아주 오래된 신비와 오늘의 신비.

오늘 본문은 다니엘의 환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페르시아의 등장, 그리고 그리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 그의 죽음으로 4명의 장군으로 나라가 분열됩니다.  그 결과 그리스 신화의 쥬피터 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4개의 나라들은 로마에 의하여 멸망 당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다니엘서의 특징은 어떠한 역사적 예언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4절의 예루살렘 성전에 쥬피터 신상이 세워지지만, 2천 3백일만에 그 우상이 제거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독립전쟁의 승리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승리와 성전 청결이 오늘날의 하네카의 유래가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독립도 자체 분열로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역사적 예언이 매우 신비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으로 오늘도 이 세상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언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에게는 신비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다니엘서의 내용을 실제 역사적 사건 이후에 기록, 또는 조작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신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조작이라고 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철저한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상징으로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에는 미래를 설명 합니까?  요한 계시록에도 뱀, 용, 양, 숫자등 많은 상징이 나타납니다.  계시록은 2천년 전 신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계시록의 많은 상징들과 숫자를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들은 당시 교회를 박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내용을 알려 줄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알게 되면, 오히려 교회를 박해 합니다.

다니엘서도 2천 5백년 전을 살아가는 바벨론의 포로와 페르시아의 지배 밑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어려운 내용이 아니였습니다.  수천년이 지난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에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 정신, 지식이 그때와 다르기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용은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나와 틀린 것이 있으면, 그것을 틀렸다고 합니다.  나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와 차이가 있는 것이 있으면,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2016년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2016년에 살기에 다니엘서에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와 틀린 것이 있지만, 진리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와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 해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아주 오래된 신비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러한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의 신비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신비를 누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7장-억지로 푸는 성경

우리들이 예전에 모르는 길을 찾아 다닐 때에는 Thomas Guide와 같은 지도책을 갖고 다녔습니다.  지도를 보고 대략적으로 머리에 약도를 그립니다.  만약에 길을 잃으면 찾아가고져 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반드시 지나쳐야 할 중요한 건물이나 위치, 이정표를 묻습니다.  중요한 건물, 동상, 사거리, 가게의 Sign등을 보고 길을 찾습니다.  이렇게 길을 찾아가면 두 번 다시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GPS을 사용합니다.  주소만 입력 시키면,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줍니다.  별 생각없이, GPS 지시대로 가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다시 그 길을 찾아 갈 때에 GPS도움 없이 가면 길이 매우 헷갈립니다.  길을 찾아가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길을 가면서 중요한 건물, 길의 아름다움, 가고 있는 길의 계절의 변화, 사람의 변화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날 성경의 예언서, 요한 계시록, 다니엘서와 같은 예언서를 지도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GPS와 같이 정확하게 이해해야합니까?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GPS와 같이 이해해서 예수님이 몇 날 몇 시에 오신다고 합니다.  바벨론과 로마가 때를 성경에 예언에 맞추려고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이 세상의 역사적 내용과 일치 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 세상의 역사의 GPS로 이해합니다.  그 결과 장차 이러한 일들이 일어 날 것이고, 예수님 재림의 때가 언제라고 말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4개의 짐승이 나타납니다.  사자, 곰, 표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사자는 바벨론, 곰은 페르시아, 표범은 시리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라를 정하다 보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은 로마라고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스만 터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을 정확히 푸는 것 같지만, 베드로의 말대로 억지로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역사와 일치 시켜야 할 의무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역사적 내용이 있지만, 우리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지도와 같습니다.

성경의 핵심과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우리들이 길을 잊고 헤메 일 때에 이정표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중요한 건물, 동상, 사거리, 가게의 Sign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계시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사건을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v.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v.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v.9) 옛적부터 계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As I looked, “thrones were set in place, 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 His clothing was as white as snow; the hair of his head.  하나님은 그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찾아오십니다.

(v.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모든 인류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v.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until the Ancient of Days came, and judgment was passed in favor of the saints of the Highest One, and the time arrived when the saints. 9절의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Came and judgement was passed (or given) 입니다.  예수님 오심으로 이미 말세와 심판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이 땅의 오심으로 우리에게는 이 땅의 나라, 교회가 주어졌습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가야 할 천국이 예시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용이 너무나 길어지기에 이만 줄입니다.  4 번째 짐승을 억지로 풀려고 하는 시도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저는 그들의 성경적 열심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억지로 푸는 것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불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걱정이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은 지도책과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이 계시됩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성경을 풀어 시험 당하지 않는 신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6장 오해되는 진실

주일 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다니엘의 사자굴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향하야 기도합니다.  이러한 다니엘을 모함하려고 다리오의 신하들이 왕에게 30일동안 왕이 아닌 다른 신에게 절하는 자는 죽이는 명령을 내리게합니다.  이러한 왕의 명령을 알면서도 하나님에게 기도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죽지 아니하고 다시 살아나고 다니엘을 죽이려던 자들이 오히려 사자굴에서 왕의 분노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크게 오해하게 합니디.  다니엘서는 2 가지의 언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 입니다.  문자의 발명은 페니카아인들입니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이 아람어의 형태를 갖습니다.  이러한 아람어의 알파벳은 히브리어의 알파벳, 그리스, 라틴, 오늘 날의 영어에까지 연관이 됩니다.

다니엘서는 아람어와 히브리어 2 개의 언어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알 수 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사용하는 사람도 아람어를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2-7장은 아람어입니다. 8장에서 마지막 장은 히브리어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쓴 의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6장입니다.  6장의 내용을 아람어로 읽는다면, 다니엘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다리오 왕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이방인이 하나님 믿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다니엘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배경을 이해하고, 읽으면 6장은 다리오 왕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 페르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서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서 이 세상, 우주만물의 하나님의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의  8장-12장의 예언서의 내용은 히브리어 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이렇게 진행 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유대의 하나님으만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 역사와 통치자임을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이 읽을 수 없는 히브리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서의 중요한 강조는 하나님이 유대를 벗어나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6장의 내용을 다니엘에 초점늘 맞추는 것은 성경은 반대로 해석합니다.  6장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리오 왕의 믿음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가장 성경을 오해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한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실수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의 주인이시며, 하루를 창조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단순한 나의 믿음의 세계에서 세상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5장 -저울에 달기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달아보는 도구입니다.  저울이 상징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법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여신의 모습입니다.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동상입니다.  저울로 죄의 무게를 달아보고 무게에 따라 처벌을 받는 상징이 됩니다.

사회적 법의 저울 앞에서 우리들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양심의 저울 앞에서 우리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의 저울로 우리 자신을 달아본다면 우리는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어떠한 저울에 달아봐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칼을 들고 있는 여신에게 징계를 당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저울에 우리 자신을 달아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베사살왕이 잔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전의 도구로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이 나타나며, 벽에 다음과 같은 글짜가 나타납니다.

(v.26)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합니다.  메네을 26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나이다.”   데겔은 “당신은 저울에 달렸다”입니다.  “당신은 너무 가볍다”라는 뜻입니다.  우바르신은 (28절)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댜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되었다.  나라가 망해서 두 나라가 나누어 갖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저울에 우리의 무게를 달아본다면, 죄의 무게가 엄청날 것입니다.  세상 법과 양심과 도덕과 윤리의 저울에서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저울에 달아본다면 우리는 말 할 것이 없이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저울의 있습니다.  십자가의 저울에서 우리의 죄는 무게가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양심과 법의 저울의 죄악도 십자가에서 용서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날까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쌍둥이 처럼 함께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로 똑같이 번역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의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미슈파트와 제떼카입니다.  영어로는 Justice와 Righteousness입니다.

 (롬 3:19)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얻어지는 의는 Justice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법의 저울로 하나님의 법으로 우리는 죄인입니다.

(롬 3:21-220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외에 다른 의는 Righteousness of God입니다.  완전히 다른 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타나는 의입니다.  이러한 의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받은 증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에서 쌍둥이와 같이 함께 따라다니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오늘 수요 예배 이사야 51장 강해에서도 나타납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기능적으로 이해합니다.  십자가의 기능적 이해는 외형적으로 맞지만, 내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 of God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지, 기능이 아닙니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으로 이해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죽으시는 한 마리의 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오셨고 우리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맞지만 이것 만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기능으로 이해하면 현실에 불만족 합니다.  하나님에게 집요하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축복을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능적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치유자, 해결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적과 능력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내적 치유, Inner healing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감정에 빠진 것을 영성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과 감정의 구분조차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 of God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해되면, 우리의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의지하기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의 삶의 내용이 인격적으로 변화합니다.  성숙합니다.  나의 십자가가 확실히 발견되기에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죽음 너머의 천국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저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십자가로 나를 찾아오시고, 나는 십자가로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하나님을 만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4장 -가장 안타까운 사람

우리 주변에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Trumph가 공화당의 후보로 결정되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현하지만, 그저 바라봐야 합니다.  Hillary의 e-mail 사건으로 법적 책임이 생긴다면 공화당의 지도부도 Trumph을 지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Dollar을 무한정 찍어 나라의 빚을 갚겠다는 Trumph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일은 Trumph을 지지하는 미국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착각합니다.  실업과 경제적 불이익을 외국 때문에 당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피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Trumph을 택합니다.  Trumph가 미국의 국기 뒤에서 항상 연설을 하지만, 그는 미국의 국기와 국민을 기만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일에는 Hillary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속임에 미국 시민과 우리들이 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안타까운 일을 당하지 아니하려면, 우리들이 상식과 건전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상식도 건전한 판단력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느부갓네살에 대한 예언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은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해몽합니다.  꿈의 내용은 그가 짐승이 되어 광야에 나가 풀을 먹고 소처럼 살다가 7년이 되면 다시 왕이 된다는 꿈입니다.  왕은 꿈의 내용대로 광야에서 소처럼 풀을 먹고, 이슬에 몸이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이 되고,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됩니다.  왕이지만, 사람이지만, 짐승이 되고, 짐승에서 다시 사람이 되어, 왕이 됩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왕이 짐승이되고, 짐승에서 다시 왕이 됩니다.  왜 사람에서 사람답게, 왕이면 왕답게, 아버지면 아버지 답게, 신자면, 신자답게, 살 수 없습니까?  왜 우리는 중간에 짐승이 되는 과정에 빠집니까?

그 이유는 교만입니다.  우월감입니다.  신자이지만, 영적 우월성에 빠져서, 세상에 대해서, 상식과 예절과 배려와 도덕성에 빠진 짐승과 같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짐승과 같은 야망으로 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야망과 야심을 감추려고 동료와 교회를 허무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느부갓네살에게 이러한 일이 생깁니까?  (단 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우리는 이렇게 성급하게 해석합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해석입니다.  성경의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면 왕으로 사람 앞에서 태도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얼마나 포악스럽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했습니다.  그는 사람이지만 짐승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에서 벗어나면 짐승에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일이, 미국의 대선에서 일어나기에 안타깝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후보가 상식과 예절과 배려와,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과 같습니다.  약한 이민자와 여자를조롱합니다.  강한 다수의 백인표를 얻으려고, 불의한 행동을 조장합니다.  이러한 장단에 춤을 추는 미국의 소위 보수교인들도 (실제로는 보수도 아닙니다.) 짐승과 같습니다.  미국의 교만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영적 교만으로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잇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짐승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며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상식과 건전한 판단을 해야합니다.  이렇게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2장 31-49: 신상의 파괴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꿈을 꾸고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꿈의 내용과 꿈을 해석해줍니다.  왕은 꿈에 거대한 신상을 봤습니다.

그 신상의 황금의 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리고 놋 배와 넓적다리, 철 종아리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이후에 세상을 통치하게 될 나라들이라고 해몽을 해줍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뜨이지 않은 돌이 이러한 신상을 파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상에 나타나는 나라들에 대한 해석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놋 배와 넓적다리는 알렉산더의 그리스, 철 종아리는 로마라고 합니다.  우상을 친 돌을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신상의 모습의 변화를 통해서 인종간의 갈등과 왕권 중심에서 로마의 원로원 정치로 변화까지도 해석을 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미래의 모습까지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을 미래에 대한 내용이기에 우리들이 이러한 다양한 미래적 해석을 믿고 따라야 하는가 질문해야 합니다.  성경을 미래적으로 우리들이 해석하는 것에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단 2:29) 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왕이 걱정이 많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근심이 많았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합니다.  전도서5장 3절과 7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v.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v.7)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왕의 꿈의 시작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자신의 왕권의 유지와 사방에서 공격하는 적들과 부하들의 배신에 대한 걱정으로 그는 잠을 자지 못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압박으로 그는 4장에서 자신을 짐승으로 착각하는 정신병에 걸려 소처럼 풀을 먹기도 합니다.  나중에 치유됩니다.

(단 2: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다니엘은 왕이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게하는 것이 해몽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다니엘은 신상의 내용이 왕에게만 해당되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이 내용과 해몽을 믿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꿈의 내용이 4장에 똑같이 반복됩니다.  꿈의 내용과 해몽이 매우 개인적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2-3-4장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초점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면에서 다니엘서를 미래적 초점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억지로 푸는 것이며, 매우 위험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도 왜 수많은 상징적 내용으로 쓰여졋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당시의 핍박받는 교회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보여줄 교회와 신자들의 영광의 내용입니다.  미래가 이러한 순서로 될 것이라는 것은 언급하지만, 핵심이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이, 요한 계시록과 다니엘서로 세상이 이렇게 변하게 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집안의 재정보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알 이유도 없고 자식이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이러한 일을 할 것이고, 엄마는 이러한 일을 할 것이라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식이 부모에게 집안의 재정 상태를 알겠다고 하면 그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부모의 미래가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라고 지껄이면 그 자식은 죽도록 패야 정신 차릴 자식이 됩니다.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미래와 종말 심판에 대한 계획을 우리와 의논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자식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도 그날과 때는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알려주시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입니다.

우리 모두 주어진 삶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다니엘 2장 1-30 원인과 결과

오늘 본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입니다.  본인이 꿈을 꾸었지만,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꿈을 꾼 후에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왕은 바벨론의 꿈을 해석하는 무당들과,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서 자신이 꾸었던 꿈의 내용과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음에는 다니엘과 그의 3 친구도 포함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입니다.  주어지기에 결과가 있습니다.  주어지는 것이 없으면 결과는 없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은 자동차에 휘발유가 원인이 되어 차가 움직이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숨을 쉬는 것은 공기라는 원인이 있기에 숨을 쉬고 사는 결과가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는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나는 명령을 합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타인들에게 그 내용을 자신에게 알게하고, 더 나아가서 그 내용을 자신에게 설명하라고 합니다.

원인이 없이 결과를 설명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휘발유 없이 차는 갈 수 없습니다.  공기 없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왕은 자연의 법칙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결과를 요구합니다.  사람은 원인 없이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신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벗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 납니다.  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로 5천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모두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살았으면 죽는 것이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식사로 5천 명이 먹고 남을 수 없습니다.  물리적 법칙으로 사람은 물 위를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현재에 우리들이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작심한 결과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의심도 하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핵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2 개의 세계에서 존재합니다.  하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의 자연스러운 세상이며, 또 하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부자연스러운 믿음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에는 의심이 수반됩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사이에서 갈등하며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신의 존재 증명이며, 우리에 대한 신적 개입의 증명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나 왕의 꿈의 내용을 말하고 해몽을 합니다.  세상 사람에는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세상과 원인과 결과를 벗어나 하나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내일은 꿈을 해몽합니다.

다니엘 1장 – 하나님의 것은 세상을 관통한다.

오늘 부터 다니엘서를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성경은 구약의 다니엘과 신약의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특징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2천 년 역사에서 이단의 특징은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을 강조하여 잘못된 종말 사상을 강조합니다.

다니엘서는 정말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성경입니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숫자 계산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 사상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엄청난 오류로 계산하게 됩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됩니다.  이렇게 억지로 계산하면, 가장 최근에는 다미 선교회와 Dr. Kemp와 같은 일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오해의 시작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무서운 적개심으로 이해하고 성경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철저하게 미워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을 철저한 사탄의 지배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 방식은 사탄의 잘못된 계략에 빠지는 성경적 이해입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잘못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깊어지게 되는 사람은 세상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일환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사랑하십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6-7절)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을 풀면, 다니엘 :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 // 하나냐 : 여호와의 은혜 // 미사엘 : 하나님은 강한 분 // 아사랴 : 여호와는 도움.  3 사람의 이름에 모두 하나님의 뜻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이렇게 변경합니다.  벨드사살 // 사드락 // 메삭 // 아벳느고 당시 바벨론의 우상의 이름들입니다.

다니엘과 3 친구의 이름의 변경은 철저한 바벨론의 문화와 풍습에 빠지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3 친구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합니다.  채식과 물로 살겠다고 합니다.  철저한 세속주의에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입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왕의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얼굴보다 더 좋게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세상을 적대시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봐야합니다.

(17)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학문은 바벨론의 학문입니다.  그 중에 다니엘에게만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환상과 꿈은 유대 종교에서 우상의 것으로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입니다.  환상과 꿈은 바벨론 종교 해석, 우상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바벨론의 종교적 방법 까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거나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학문과 이 세상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적 지식에 무식하면 안 됩니다.  성경적 지식을 아는 것 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성찰하고, 세상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단의 특징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촌과 같은 것들이 생깁니다.  신앙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가장 비신앙적 태도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고 용감하면 자신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무식하면 용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무식한 것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3 친구를 세상 지식에서 절대로 무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다니엘에게는 당시의 세상의 지식의 최고인 환상과 꿈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이해가 없으면 다니엘서는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관통합니다.  마치 배와 같습니다.  세상의 한 가운데 있지만 세상의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세상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가장 현명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배를 세상의 바다에서 지혜롭게 항해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8장 – 새로운 예루살렘

에스겔의 마지막 장입니다.  이스라엘의 12 지파에 대한 땅의 분배입니다.  레위지파를 포함해서 땅의 분배를 받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40장 부터 48장은 아주 난해한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내용은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땅의 분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지만, 가나안 주민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해야 했습니다.  단 지파는 땅을 차지 하지 못하고 스스로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어떤 지파는 적들과 함께 동거합니다.  어떤 지파는 주어진 땅을 제대로 차지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호수아 13장 부터 잘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땅의 분배는 끝까지 지켜지지 않습니다.  앗수르, 바벨론의 침입으로 모든 땅을 빼앗깁니다.  AD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 할 때에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한 명도 남아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역은 팔레스틴으로 변경이 됩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동안 그 땅은 이스라엘의 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영국의 지배를 벗어난 팔레스틴의 지역에 이스라엘의 자치지역이 생깁니다.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오늘 날의 이스라엘에 다시 탄생합니다.  여호수와와 같이 그 지역의 주민들과 싸워서 오늘의 땅을 얻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땅을 또 빼앗길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여호수아서의 역사가 반복됩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중동의 강자이지만, 그 강한 것이 영원하다고 믿는 자는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인류의 모습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반대로 이해합니다.  그 땅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땅의 분배는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땅의 분배입니다.  하늘 나라를 소망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땅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소망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아닙니다.  St. Augustine 하나님의 도성에서 말 한 거처럼, 인간의 죄악으로 얼마든지 무너지는 것이 이 땅의 예루살렘입니다.  진정한 예루살렘의 성전의 시작은 오늘날의 교회,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이 땅의 예루살렘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예루살렘을 소망하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47장-영광의 예언

성전의 동쪽의 문지방 밑에서 약하게 물이 흐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물의 양이 넘치고 넘쳐서 헤엄을 할 정도에서 나중에는 건너가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물은 죽음의 소금 밭을 적시어 생명의 장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살려내는 물이 됩니다.

그리고 이 물이 흐르고 지나간 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땅이됩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에게도 나누어질 땅이 됩니다.

이렇게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으로 주어진 생명과 진리의 물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주 미약하게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12명의 어부들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 물은흐르고 흘러, 이 세상을 적시어,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까지 흘러왔습니다.  누구도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물을 거부 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은 이 세상을 차고 넘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걱정을 합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명과 문화 속에서 생존 할 것인가를 염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타락으로 교회의 사회적으로 빛의 역활이 끝났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정이 교회를 구원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에 너무나 동떨어졌기에 우리 후손들이 교회 출석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2천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항상 2 가지의 적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교회의 안의 적이 있엇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가장한 적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이단의 적들과 싸웠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사악한 적들은 교회안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사악한 적들의 공격의 목표는 바로 오늘 날의 교회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가장 복음적이고, 가장 열정적인 것 같지만, 항상 교회를 비난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결과를 갖고 옵니다.  사탄의 사악한 역사입니다.

또 하나의 적은 세상의 집요한 박해입니다.  세상의 박해는 육체적 정신적 박해입니다.  로마와 같은 정권의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정신적 박해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하나님이 없다는 인간의 사상과 지식은 우리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다원의 진화론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래로 우리 안에 영적 세계가 없어집니다.  이러한 정신적 지식적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물은 점차로 차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물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칠 때에, 예수 그리스는 다시 오십니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핍박과 박해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의심과 불안이 있지만, 성령 하나님은 교회를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세상의 물과 예수 그리스도의 물이 동시적으로 차오르고 있습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졌다면 어느 물이 우리를 죽이는 물이고, 어느 물이 우리를 살리는 물인지 구별해야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복음과 진리의 물을 마시면서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