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9장 돈과 죄인

우리는 돈이 우리를 죄인이 된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속이고, 돈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돈 때문에 배신하고, 심지어는 살인도 합니다.   돈 때문에 우리들이 죄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돈은 종이에 불과 합니다.  돈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돈의 생명은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돈이 있으면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나누어 사용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 돈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타인의 것을 빼앗습니다.  그럼으로, 돈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돈을 사악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돈이 많은 부자는 행복하고, 돈이 없어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믿습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악한자에게 돈이 많아도, 그 돈으로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는 행복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마음의 풍성함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부는 저주입니다.  부유하기에 더 불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v.23)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부자이기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우리들이 부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에게도 좋은 부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부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주님이 부자이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의 부자는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만 돈이 주인이 되면 그는 부자입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는 것은 우상, 돈을 버리고,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는 물질이 주인입니다.  돈이 우상입니다.   우리들이 돈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돈은 선과 악으로 나타납니다.

돈을 쓰지 않고 모아만 두면 수전노가 됩니다.  수전은 한문으로 지킬 수 돈전입니다.  돈을 지키는 자입니다.  노는 노예 노입니다. 돈을 벌었지만 돈의 노예가 됩니다.

돈을 벌었지만,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졸부라고 합니다.  졸부를 한문으로 보면 개와 사슴의 짐승 변에 마칠 졸입니다.  짐승과 같이 빠른 것을 졸이라고 합니다.  졸부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빠르게, 마음과 삶이 가난해집니다.  돈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따르면 졸부가 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부자를, 천석군, 만석군으로 군(君)을 사용합니다.  군은 임금 군(君)에서 유래됐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선한 부자를 임금과 같이 대접을 했습니다.  부자들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임금과 같은 부자는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가난한 자의 전답을 사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방 10-30리에 굶는 사람에게 양식을 풀었습니다.  진짜 부자는 부엌의 연통을 아주 낮게 만들었습니다.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게 했습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그 집의 남자들은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앗습니다.  아녀자들은 무명 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부자는 몇 백년의 부를 유지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 한국, 경주에 이러한 부자가 있습니다.

 

돈을 지키면 부자가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돈을 지키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Old money의 생존전략입니다.  존경 받고, 그 부를 지킵니다.  카네기 홀과 미국의 수많은 도서관 Manhattan의 수많은 박물관과 예술활동은 부자들의 헌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도 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돈을 빚지는 것을 죄로 표현합니다.  빚만 지지 않으면 반드시 부자가 됩니다.  없으면 쓰지 말고, 노력해야합니다.

 

마태복음 18장 사랑과 가치

이 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의 하나가 가치입니다.  가치는 2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 가치입니다.  크고 작은 숫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또 하나는 철학적 가치입니다.  이 시대는 절대가치가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입니다.  너와 나의 가치관의 비교입니다.  이것을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숫자적 가치가 물질적이라면 철학적 가치는 정신적입니다.  우리는 두개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치관을 파괴합니다.  너희는 99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십니다.  수학적 가치와 철학적 가치의 질문입니다.  99 마리의 양과 1 마리의 양입니다.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의 수학적거치는 99마리가 중요합니다.  철학적 가치도 99마리가 중요합니다.  다수의 의견과 다수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습니다.  99 마리는 안전한 우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산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갑니다.  산에는 늑대, 곰, 들개가 양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는 한 머리보다 못합니다.  

주님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을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의 양을 영어로 Lost Sheep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영어 번역을 보면 Lost 대신에 Astray를 사용합니다.  Astray 길을 잃고, 타락하다는 의미입니다.  Hella로 Planeo인데, 미혹을 당하다, 속다입니다. 영어로, Deceive, Misguided , Mistake로 번역합니다.  마태복음의 길 잃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떠난 양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치관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사랑입니다.  한 마리 양은 예수님의 사랑을 벗어나 양입니다.  숫자보다, 철학적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99마리의 양은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양들입니다.  곰과 늑대의 공격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어떠한 도전과 시련을 이겨 냅니다.  사랑은 죽음도 이겨냅니다.  사랑을 확신하며 사는 자는 진정한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한 마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사람도 사랑하고, 가장 높은 숫자의 가치를 갖고, 모든 사람을 제압 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가져도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는 죽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우리들이 사랑을 이해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숫자의 가치와 철학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사랑이 매우 허무합니다.

사랑의 완성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믿을 때에 우리의 가치는 사랑으로 변화합니다.  99마리보다 한 마리가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사랑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마태 17장 의심

주님은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태양과 같이, 빛과 같이 변형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like the sun, 주님의 옷은 as the light와 같이 변형, Transfigured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형은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나사렛의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변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초막을 3 채나 짓자고 합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주님과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비극이고 우리의 비극입니다.

베드로는 16장에서 주님을 입술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고 17장에서 주님의 변화를 눈으로 봤지만 그의 마음에 아직도 주님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초막 3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 의심의 증거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태양과 같았습니다.  Like the sun입니다. 그의 옷은 As white as light. 옷이 희어졌는데 빛과 같습니다.  이러한 주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에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본문의 간질은 Hella로 Selenazomai입니다. Selenazomai는 Selene 달 Moon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영어 번역은 달과 관련된 Lunatick 또는 Epileptic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어떤 영어번역은 간질을 Moonstruck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도 달, Moon과 연관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달은 부정적 상징, 태양은 긍정적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간질은 달의 악한 영적 기운이 나타나고 그 달의 기운에 매를 맞는 사람에게 광적현상이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간질은 // Moonstruck, 달에 매를 맞는 자, Lunatick, 달에 영향을 받는 자가 됩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태양과 같이 변화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빛으로 달의 어두움과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간질병, 당시에는 귀신들린 자를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달이 태양을 이기고 있습니다.  당시에 달이 태양을 이기는 것을 일식이라고 했습니다.  일식은 달이 태양을 잡아 먹기에 매우 두려운 현상이였습니다.

간질병 환자는 어린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육체적 질병에 걸렸을 뿐입니다.  정말로 간질병에 걸린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불안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심을 할 때에 태양이 달에 잡혀 먹는 일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간질이 제자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은 매우 어두워졌습니다.

Greek 신화에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가 뱀에 물려 죽자 죽음의 나라의 왕 플루토(Pluto)을 찾아가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를 세상에 돌려보내 달라고 합니다.  죽음의 왕 플루토는 다음과 같은 // 조건을 요구합니다.

유리디체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그런데 이곳을 출발하여 흑암을 지나 지상의 광명을 볼 때까지 결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유리디체는 언제나 너의 뒤를 달려가고 있으니, 너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합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와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르페우스의 마음에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달이 태양을 잡아 먹습니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리디체가 정말 자기를 따라오고 있을까?  플루토 왕이 거짓말을 했거나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닐까?  죽은 사람이 정말 다시 살아나서 자기를 따라 올 수 있을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의 마음을 불신으로 정복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광명의 세상에 도착하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자기 뒤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자신의 아내 유리디체를 발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플루토의 말대로 유리디체는 다시 죽음의 나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심의 결과입니다. 의심의 결과는 태양이 달에 잡혀 먹는 일식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우리의 의심은 오르페우스처럼 의심은 또 하나의 불신을 만들게 됩니다.  태양의 빛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사라집니다.   일식은 일시적 현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빛을회복합니다.

그러나 그 일식의 시간에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심이 사라지면, (v.20)의 말씀대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게 합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으로 빛의 생활, 생명력 있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6장 나는 누구인가 고백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매우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우리들이 나 자신에게 매일 질문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모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심리학자 Carl Jung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파괴적으로 된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정신 세계는 파괴되는 중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성공하는 것 같지만 실패중입니다.  실패하는 것 같지만, 성공하는 것을 모릅니다.  

Carl Jung은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은 신 하나님에게 소속감을 가질 때에 자신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누구보다고 사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으로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과 직결됩니다.

(v.13)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냐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알고 있느냐 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실제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체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비실체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v.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이 이 대답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교육을 시킨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아주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지식과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v.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을 근거로 우리를 교회로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교회입니다.  내 자신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가 내 자신입니다.

(v.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이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까?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면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현대의 정신치유는 그 인간을 칭찬하고 격려하라고 합니다.  Positive thinking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죄성은 그 거울의 사람에게 비방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비하와 조롱과 무시는 타인에게 그대로 연결됩니다.  다른 사람과 아주 불편한 관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자신이 희생당한다고 억울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공격적으로 변화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사람은 자신에 주어진 교회의 열쇠를 자신을, 교회를 파괴하는 것에 사용합니다.

우리는 (v.16)을 베드로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Confession은 신학적 고백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고백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면 반드시 신학적 성찰, 고백의 의 과정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주요한 기독교 교단들은 신학적 고백을 갖습니다.  이단은 신학적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하겠습니다)  교회는 Confessional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에 자신을 신앙을 성찰하여 고백을 만드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4장 2개의 생일

우리는 태어나는 날을 생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을 기뻐하며 Happy Birthday라고 즐거워하며 축하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명이 이 땅을 떠나는 날을 Memorial Day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죽은 날을 슬퍼하며 힘들어 합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태도일까요?  저는 우리들이 죽는 날을 Memorial Day로 지키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죽는 날은 하늘 나라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날이기에 또 다른 Happy Birthday가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보내기에 슬프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 날이기에 기쁜 날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에 분봉왕 헤롯이 나타납니다.  헤롯은 자신의 생일날 큰 잔치를 베풉니다.  살로메의 춤에 정신을 빼앗긴 분봉왕 헤롯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을 참수형 시킵니다.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자신의 엄마, 헤로디아에게 선물로 줍니다.

아주 Irony합니다.  헤롯의 생일날 세례 요한 죽음을 당합니다.  한 사람은 태어난 날, 한 사람은 죽습니다.

헤롯의 Birth Day에 세례 요한의 Memorial Day가 됩니다.  그러나 헤롯의 생일은 그에게 죽은 날입이다. 헤롯의 Birth Day는 Memorial Day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선지자 세례 요한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헤롯의 생일날 죽었지만, 그는 새롭게 태어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날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육체적으로 Memorial Day가 되지만, 하나님에게 하늘의 Birth Day가 됩니다.

사람은 생로병사-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Birth Day와 Memorial Day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Memorial Day가 하늘 나라의 Birth Day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Happy Birth Day가 생깁니다.  우리는 두개의 Birth Day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저는 종종 죽음과 생명의 자리에 있는 분들을 심방하게 됩니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가족들은 그에게 Memorial Day가 가까이 있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Memorial Day가 하늘 나라의 Birth Day가 됩니다.  그의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2개의 Birth Day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사순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마태 13장 공존의 끝

이 시대를 현대 (Post-modern)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특징은 모든 종교가, 가치관이, 인종이, 문화가 함께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절대적 가치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거스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공화당 후보, Trump입니다.  그는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미국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타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타인종을 비하합니다.  흑백 문제를 노골적으로 건드립니다.  타 종교를, 이슬람을 노골적으로 공격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열광적으로 지지받습니다.

Trump로 말미암아 며칠전 CNN에서 미국의 인종문제을 노골적으로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치관과 문화는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Trump의 행동은 타 종교나 타 문화에게는 공격적이고, 무시하는 태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성을 갖은 계층에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시대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입니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절대적 신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이슬람은 알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는 IS 사태는 같은 알라를 믿으면서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믿는 알라가 절대적이며 상대방의 알라는 거짓의 알라고 생각하기에 서로 죽입니다.

우리 기독교도 절대적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와 길과 생명이 되십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과 타종교와 비교입니다.  우리의 절대 진리를 주장하지만, 상대방도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진리는 절대적 진리에서 상대적 진리가 됩니다.  나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일부분이지, 더 이상 절대적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들을, 기독교를 나의 Cult, 같은 종교성을 가진 집단으로 신자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적절한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존하라고 하십니다.

(v.30) 가라지와 열매를 추수때까지 함께 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리지와 열매의 뿌리가 함께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열매를 뽑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추수 할 때까지 이 세상의 문화와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과 문화와 공존해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제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은 오늘 가라지의 뿌리를 뽑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Trump와 같은 인물에게 환호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합니다.  세상을 뒤 엎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추수 할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가라지의 운명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에 살리우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우리의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Trump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으로 절대가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와 갈등를 유발시키깁니다.  하나님의 듯과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라지의 뿌리를 뽑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우리의 행위와 태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오늘도 가라지와 공존하는 우리의 시대를 이해하며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12장 -진정한 예배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회당에 들어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치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려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유대인의 율법도 많은 피를 흘리거나 목숨이 위중하면 죽어가는 사람은 안식일에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한쪽 손이 말랐다고 해서 당장 죽지 않습니다.  내일 고쳐도 무방합니다.  불편하지만 다른 손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은 안식일에 못 고치도록 했습니다.  만약에 마른 손을 고치면 안식일에 아주 사소한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는 1,000 발걸음을 할 수 없지만 어떤 병도 고치러 의사를 만나러 갈 수 있기에 십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4 계명은 무시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천 보 이상 걷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습니다.  4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마른 손을 고칠 것인가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v.15)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모든 병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4 계명을 파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병을 다 고칩니다.  그러나 주님이 안식일에 이렇게 모든 병을 고치시는 것은 사랑이 없는 안식일은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쁜 현실에서 안식일,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가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없다면 그 예배는 형식의 예배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들이 가장 크게 실수 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초점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맞추어집니다.  분명히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초점에는 사람에 대한 용서와 이해와 자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상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나의 옆 사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과 같습니다.  나의 아내와 자식, 남편 그리고 나의 옆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옆의 사람들과 관계가 나의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에, 사랑이 없을 때에, 하나님에게 위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괴롭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의 실력입니다.

한국의 김인식 야구 감독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선수마다 맞춤형 코치를 합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선수를 자신의 눈 높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코치가 선수의 눈 높이에 맞춥니다.  사랑은 나의 눈 높이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눈 높이입니다.  내가 너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너와 나와 같이 되라는 것은 강요된 사랑입니다.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v.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면,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감정과 태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옆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순절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11장-기다림

사순절은 겨울과 봄 사이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길 바랍니다.  사순절도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영주권을 기다립니다.  휴가를 기다립니다.  지겹고 힘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경제가 회복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왜 기다릴까요?  기다리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해결 될 때에 문제와 어려움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기다림을 충족시켜주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v.2)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듣고 절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v.19)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십니다.

제가, 고급 식당을 전전하며, 비싼 요리에, 술에 취한다면, 여러분은 분노 하실 것입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창녀, 도둑, 전과자, 세리, 이완용 같은 매국노라면 저에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눈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하셨습니다.

(v.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은, 우리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합니까?

주님은 자신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v.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평생의 기다림입니다.  불구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치유되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평생의 기다림입니다.  우리도, 나의 기대대로 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소원이 이루게 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우리들이 이러한 기적 때문에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v.20-2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v.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v.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v.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v.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의 기다림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불구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치유되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죄의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적을 경험하면서, 회개하지 못합니까?  기다리는 것들이 해결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기디립니다.  멀리 떠난 사람을 또 기다리고, 영주권이 나오면 시민권 기다리고, 또 다른 휴가를 기다리고, 경제가 더 잘 회복되기를 또 기다립니다. 우리는 끝없이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어려움과 문제는 끝없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다리기에 회개가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만족과 감사가 없기에 우리는 또 기다립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현재 나의 삶에서 기다리는 것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기다리기 보다 현재에 감사와 만족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 9장 -냄새

제가 몇 년전에 어느 교우한테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제목은 향수입니다.  향수는 매우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러나 향수를 만들기 위하여 끓임 없이 살인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그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소녀들을 찾아 살인을 합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몸에서 아름다운 냄새를 체취합니다.

우리는 냄새를 풍깁니다.  몸에서 냄새가 납니다.  머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발에서, 입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은 담배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냄새를 막으려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립니다.  입에 가글 (Gargle) 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냄새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의 냄새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죽으면서도 악취를 풍깁니다.  냄새는 우리의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냄새는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당시에 냄새나는 직업들과 연관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세리는 세금 걷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는 대표적 직업은 똥 푸는 사람, 가죽을 만지는 피장입니다.  똥 푸는 사람과, 가죽을 만지는 피장은 항상 몸에서 심한 악취가 났기에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지 못햇습니다.  세리와 똥푸는 사람과 피장은 죄인입니다.  세리는 냄새나는 직업과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냄새는 없지만, 더러운 직업 이였습니다.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이 가죽 만드는 피장의 직업을 갖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똥을 푸는 자와, 짐승의 가죽을 만드는 자들,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다면 예수님은 똥을 푸는 자, 짐승의 가죽을 만지는 자, 세리가 됩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악취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죄인의 자리에 앉으십니다.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은 냄새가 없지만, 냄새를 얻으려고 살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맡을 수 없는 죄의 냄새가 그에게는 진동했습니다.  욕망과 의심과 열등감이 있엇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끓임없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우리 몸에서는 똥 냄새와 같은 추악한 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은 짐승의 냄새가 나는 구역질 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리와 같은 탐욕의 냄새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Sin)로 인한 죄악(sins)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냄새를 주시려고 죄악의 냄새나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의 악취를 풍기는 우리를 찾아와서,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냄새가 사라졌습니다.  그러기에 죄의 냄새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거룩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사순절에 나의 몸의 냄새를 맡으시기 바랍니다.  그 냄새를 미워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그 냄새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으시는 아름다운 냄새의 절기가 되길 바랍니다. 

PS: 책 주인에게 책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얼마전에 찾았습니다.

마태 복음 8장 -빛

며칠전 수필가 이어령 교수가 어렸을 때에 천자문을 배우면서, 하늘을 검다고 하는 것에 (검을 현) 훈장 선생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자신이 볼 때에는 하늘이 푸른데, 천자문은 검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늘은 검은가?  아니면 푸른가를 질문해봐야 합니다.  사실 답은 둘다 맞습니다.  하늘에 태양 빛이 찾아오면 하늘은 푸른 색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찾아오지 않는 밤에는 하늘의 색갈은 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밤의 하늘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이고, 천자문은 낮의 하늘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태양이 비추어도 하늘 높이 우주선이 올라가면서 보여주는 하늘은 검정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천자문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요한 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고대 신화에서 빛은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모든 신화에서 태양과 태양의 빛은 신적 존재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빛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를 빛과 같은 존재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빛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전자파입니다.  전자파는 빛이지만, Energy을 갖고 있습니다.  전자파는  파장이 아주 짧기에 Micro파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집에서 사용하는 Micro Oven은 이러한 전자파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 보낼 수 있습니다.  Radar에 사용합니다.

두 번째는 적외선입니다.  전등에 손을 대면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적외선 때문입니다.  적외선은 열선입니다.  공항에서 적외선 Camera을 사용해서 Flu 환자를 구별해냅니다.  체온이 높은 사람이 적외선 Camera을 지나가면 빨간색으로 나타냅니다.  적외선은 열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외선이 있습니다.  자외선은 병균을 죽이는 살균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이불을 바깥에서 말립니다.  빛에 의한 살균소독입니다.  우리 몸에서 Vitamin D를 합성하는데도 자외선이 꼭 필요합니다.  현대인에게 암 발병률이 높은 이유의 하나는 자외선의 부족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네 번째가 가시광선입니다.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빛은 수만 개의 빛의 입자 중에 우리는 일곱 개의 색갈을 봅니다.  빨강 // 주황 // 노랑 // 초록 // 파랑 // 남색 // 보라의 일곱 색입니다.  수만 가지의 색에서 우리들이 보는 것은 일곱 개의 색에 불과합니다.  개는 색맹이기에 색을 구별 못합니다.

마지막은 X-Ray입니다.  빛이지만 인위적으로 높은 전압을 가하면 물체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빛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를 빛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받은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전자파가 나타나야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말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적외선이 나타나야합니다.  너와 나의 오고 가는 말 한 마디가 따뜻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외선이 있어야합니다.  나의 죄악을 주님에게 고백하고 남의 약점에 인내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시광선이 나타나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무지개와 같은 색갈이 있어야 합니다.  정숙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색갈이 나타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X-Ray가 나타나야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옆 사람은 아픔과 슬픔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야합니다.

이러한 빛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