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1장-갈등에서 우리의 태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 앗수르를 회개시키라고 합니다.  요나는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고통을 준 앗수르를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전체적 내용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불만을 갖고 있는 요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요나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만, 앗수르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예언서의 중요한 흐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서 만민의 하나님, 앗수르의 하나님, 우주적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미국의 대선에게 가장 중요한 Issue의 하나는 기독교에 무슬림의 종교적 갈등입니다.  어제도 언론에서 하루 종일 다룬 것은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중동계 미국인으로 전사한 Kahn 부모를 비난한 Trumph에 대한 내용이 됩니다.  미국 대선에서 이렇게 종교가 중요한 내용이 된적이 없습니다.

Kahn의 부모는 Trumph의 무슬림과 남미계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미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모든 인종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헌법에 대한 모독하는 행위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Trumph가 반발을 했지만 그의 반발이 오히려 심하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 가지 세계관이 있습니다.  종교적 세계관과 일반적 세계관입니다.  제가 일반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2 개의 세계관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무슬림, 불교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은 2개의 세계관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의 지배를 받고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2 개의 세계관은 일치 할 수 없고 충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과거에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왕이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고 그 백성들을 강물로 끌고가서 자신이 믿는 종교를 강요했습니다.  만약에 그 강물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그 강물에서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고 그 왕이 믿는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그 지역에서 태어나면 그 지역을 통치하는 왕의 종교를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종교의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결과 기독교 문화, 불교문화 이슬람 문화권이 생겨나게 됩니다.

종교가 그 백성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종교법이 세속적 법보다 우위입니다.  종교가 그 민족을 통치하는 기반, 근본이 됩니다.  이러한 국가를 종교국가라고 합니다.  오늘 날의 중동의 Iran, Saudi Arabia가 됩니다.  미국, 한국은 종교 국가가 아닌 세속국가입니다.  종교가 국가의 근본이 아니라 헌법이 국가의 기반을 이루어 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속법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자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아니하기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타종교 신자도 동일합니다.

오늘 날 기독교는 타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종교로 인정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이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인정해야하는지 혼란중에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와 같은 종교로 인정한다면 종교 다원주의가 됩니다.   그들이 믿는 신과 우리 하나님이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상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효화 됩니다.  우리 구원의 가치가 상실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타종교를 구원해야 할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공격적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방어적이기에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헌법은 종교적 갈등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아주 좁습니다.  이것이 Post-modernism, 다극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Catholic은 1962년 바티칸 공회에서 타종교를 잊혀진 형제, 갈라진 형제라고 합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동방정교와 개신교는 로마 Catholic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잊혀진 형제이기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기에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티칸 공회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려는 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포용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슬람에게, 예수님은 예언자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절대로 수용 할 수 없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선택을 합니다.  로마서 13장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당 할 때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정신과 가치를 우리의 현실에서 만들어내야 합니다.  갈등과 분열과 나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v.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v.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v.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v.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v.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v.6)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v.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v.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v.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v.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v.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v.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v.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v.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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