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2장 -하나님 앞에서 정직

우리들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다면 언제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는 거짓이 본능적이라고 합니다.  모든 행동과 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짓이 있다고 합니다.  거짓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거짓에는 정당한 합리성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파서 약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약이 쓰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은 상대방을 속이지만, 긍정적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적에게 자신의 생명이 위험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거짓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속여서, 그 위험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거짓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삶이 악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을 당한다면, 거짓을 말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가장 무서운 순간은 죽음의 직전입니다.  죽음의 문턱입니다.  저는 이때에 모든 사람이 가장 정직해져가는 순간이라고 봅니다.  가장 두려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모든 것, 고통과 아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두고 떠나기에 거짓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함께 갈 수 없는 곳이 죽음입니다.

요나는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음부 // 스올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기도의 내용이 매우 정직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기에 우리를 정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v.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v.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죽음에서 그는 니느웨 성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려 주신다면 그는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서, 회개를 요구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서 살고 싶은 열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죽음에서 // 음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는 1장에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큰 소리를 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사는 것이 최고의 희망과 소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갔다 오셨습니다.  요나가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토함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감사와 승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고, 환경을 비난 할 수 있고, 나의 부족으로 거짓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