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22-37 (우리의 선과 악)

우리들은 어떠한 일에 반응을 합니다. 우리의 일반적 반응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면 선한 것이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면 악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3가지 질병을 갖고 있습니다. 귀신들렸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앞을 보게 됐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기적을 보고 2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무리는 Hella로 Oklaso입니다. 그들은 법적 신분 보장을 받는 일반백성 Laos나 Demos가 아닙니다. 그들은 소작을 하다가 농지를 빼앗겼거나 남의 돈을 갚지 못한 빚진 자, 세상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줄 혁명가로 봤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고 기존의 종교 계급 지주들을 타파합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사탄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매우 껄끄러운 상대입니다. 예수님이 하층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로 하층민 백성을 통제했지만, 예수님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한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현상을 놓고 한쪽은 다윗의 자손 선하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바알세불 악하다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v.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주님에게 어떠한 잘못을 해도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모독은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너무나 표면적 해석입니다.

성령을 훼방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 훼방은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신자로 과거에 성령을 무시하거나 거절해도 성령 훼방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 했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성령 훼방은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모욕하면 성령 훼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기적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적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귀신들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앞을 보게 됐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제사장 바리세인들은 이것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것이기에 성령 훼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따라 거짓으로 주님을 거부합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거절하는 것이 성령 훼방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선과 악을 새롭게 정리하십니다. 주님은 선과 악이 우리의 유익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선과 악은 우리 마음에 쌓아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유익에 따르는 선과 악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령의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절대적 절망이 있지만, 실패가 있지만, 인내하고 감사합니다.  그 절대적 절망과 실패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인생의 해답을 얻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령 훼방은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부정합니다.

이러한 성령 훼방에서 벗어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 5:14-16 (빛의 종류)

철학의 근본 구조를 제공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사람들은 동굴에 쇠사살에 묶여 빛을 뒤로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볼 수 없기에 플라톤은 우리는 빛의 그림자를 진리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빛은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선과 의와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빛은 다릅니다.  플라톤의 빛은 선의 빛, 진리의 빛, 행복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악의 어두움, 불행, 불의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원론적 사고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빛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v.14-a)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빛은 생물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요소입니다.  빛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자연의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빛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요한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이 참 빛 하나님으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안에  참 빛이 있습니다.

철학의 빛은 우리들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빛입니다.  이 빛은 상대적인 빛입니다.  선과 악을 벗어나지 못하고, 행복과 불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이유는 참 빛, 예수님이 찾아오심입니다.  죽음에서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빛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빛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은 빛을 철학적으로 이해합니다.  신앙의 가치와 목적이 현세구복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의 비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면 세상의 빛에서, 철학의 빛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이동해야합니다.

이러한 빛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철학과 세상의 가치에 머물게 됩니다.  진리에 머무는 신앙, 빛의 신앙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5장 13절 – 소금

제가 Los Angeles에 가면 길거리에서 남미 사람들이 파는 과일을 꼭 사먹습니다.  그들이 파는 과일에는 소금을 뿌려줍니다.  달달한 과일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없을 것 같지만 아주 맛이 있습니다.  특히 Mango와 Avocado에 소금을 뿌리고 먹으면 아주 맛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추가루도 뿌립니다.  음식을 맛 내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감옥을 탈출한 사람들이 러시아의 깊은 산으로 도망을 다닙니다.  1 달 이상 다니더니 사람이 죽어갑니다.  산에서는 소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두고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은 돈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Salary을 봉급이라고 합니다.  Salary는 Latin어의 영어 Salt의 의미입니다.  소금이 돈으로 봉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군인의 봉급으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소금은 국가 전매 사업입니다.  소금은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의미는 소금과 소금이 함께 있을 때에는 소금의 가치가 없습니다. 맛을 내야 할 이유도 없고 방부제의 역할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있을 때에 소금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세상에서 맛과 방부제의 역활을 해야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을 설명해야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의 역활을 합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와서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정치와 경제와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됩니다.  이때에 교회는 타락합니다.  소금의 역활을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시대는 현대는 다원주의 세계입니다.  다원주의라는 것은 세상의 기준점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세상의 기준점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원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속기관으로 전락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초대 교회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증명해야합니다.  변명해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명하는 방법의 하나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신자다운 맛을 주고 세상을 썩지 않는 역활을 해야합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시대에서 소금으로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복음 5장 1-12절 – 팔복

산상수훈을 생각하면 많은사람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성화들이 이러한 모습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셨지만 제자들이 주님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4장 후반절에 주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럼으로 산상수훈은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주님께 나온 것 같습니다.

본문을 팔복이라고 합니다.  성지순례에 가면 반드시 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팔복교회입니다.  제가 이곳을 잘 기억하는 것은 우리 큰 애가 첫 번 모자를 사주었는데 잃었습니다.  이스라엘 간다고 하니 두 번째 똑같은 모자룰 사주었는데 그 모자를 이곳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저에게는 복이 없는 곳이라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택시를 타고 백화점을 찾아가 백화점의 모든 가게를 뒤지다시피 해서 똑같은 세 번째 모자를 살 수 있었습니다.  모자 안에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모자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팔복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팔복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팔복도 잘 보시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팔복은 이 땅의 복을 주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팔복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팔복은 제가 쉽게 잃어버리는 모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하고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리고 첫 번 복과 마지막 복이 천국으로 끝이 납니다.  최종의 복은 천국의 복입니다.  그 복을 위하여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같이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복을 찾으시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12-17 (예수님에 대한 오해의 시작)

오늘 본문의 배경은 매우 어둡습니다.  마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막 시작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일년의 시간이 지난 간 후에 본문이 기록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태 2장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이것은 왕에게만 드리는 예물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왕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마태  3 장에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4 장에서는 마귀의 시험을 3 번 이기시고 천사들이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이 다 사라지게합니다.

(마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세례 요한이 체포 된 소식을 듣고 주님이 갈릴리로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듯이 예수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다른 사람에게 비겁하게 보입니다.  약하게 보입니다.  멸시와 천대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어두움에서 빛이 되는 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4:16-17)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십지가를 이해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태 4장 8-11 (양심과 신앙)

이번에는 마지막 시험입니다.

(v.9)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사탄에게 절 한 번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원의 목적이 달성됩니다.  십자가 사라지고, 사탄에게 경배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살면 해결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 경제적 손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돈을 벌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거짓도 있고 양심을 속이는 것이기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신앙적으로 떳떳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는 우리들이 세상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양심을 지키며 살라고 합니다.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신앙을 지키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럴듯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음성입니다.

(v.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상관 없이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우리에게 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양심적이 아니라고 해서 그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무조건입니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늘도 사탄에게 속지 않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스가랴 1장 1-8 환상의 시작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해방이후에 대한 예언입니다.  7절 부터 8개의 환상이 나타나고, 마지막,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나타납니다.  학개와 패턴이 유사합니다.  학개도 바벨론 포로 이후에 내용과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는 성전을 파괴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직책은 종교 계급입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러한 종교 직분, 예언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입니다.  굉장한 모순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종교적 직책이지만 이러한 직책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v.4)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v.5)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v.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러한 종교행위와 계급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다가 벌을 받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성전이 파괴된 벌을 받고 하나님에게 돌아왔다고 합니다.  즉 새로운 종교적 체제의 등장입니다.  그럼으로 과거의 조상들이 행하던 종교적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8개의 새로운 환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일 부터 하나씩 공부 하겠습니다.

스바냐 3장 -인간과 하나님의 역사관

스바냐 2장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하신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유대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14절에서 20절에서 하나님이 유대를 승리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14-15절만 소개합니다.

  (v.14-15)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v.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유대를 승리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관입니다.

인류의 역사관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의 역사를 원인과 결과로 해석합니다.  한 개인의 역사도 원인과 결과입니다.  오늘 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노력하고, 공부하고, 좋은 씨앗을 뿌려야 좋은 열매를 얻는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와 경제의 논리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국의 한진해운 사태도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로 해석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노력하고, 정직하고, 공부하고, 좋은 씨앗을 뿌렸지만, 그 열매와 결과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유 없는 질병과 고난을 당합니다.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국가적 자연재해도 있습니다.  Hurricane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일들입니다.

때로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지만 엄청난 성공과 행복을 맛봅니다.  매사가 잘 됩니다.  나의 노력과 의지에 비해서 나는 얻는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는 2 가지의 역사가 공존합니다.  인간에 의하여 진행되는 원인과 결과의 역사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적용되지 아니기에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스바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을 이유 없이 이방인들에게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들의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가 원인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동시에 너희들을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는 이방국가들은 하나님이 심판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원인과 결과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상 숭배로 이러한 영광과 자격에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은혜적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인과 결과의 역사에서 은혜의 역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고난과 시련, 인생의 어려움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종말적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적 승리를 향해 가지만, 오늘의 승리와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며 살아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적 종말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길과 체험을 경험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예배입니다.  기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교회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우리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1장 -의심과 질문을 원하시는 하나님

하박국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바국을 이해하려면 한번에 다 읽어야 합니다.  대략적 내용은 1장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도전이고, 2장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고, 3장은 이 대답을 들은 사람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이해 해야 할 내용의 하나는 악에 대한 이해입니다.  왜 하나님은 악을 허락하시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악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 악이 있기에 하나님의 세상을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문제를 1장에서 하나님에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해 할 수 없는 악함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 생명의 죽음이 있습니다.  악한 독재자에 의해 북한 동포들은 3대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이 선한자의 것을 빼앗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v.13-14)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v.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어, 악을 보지 못하시냐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어, 악이 선을 이기어도 참으시냐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를 한 마리의 벌레로도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의 결론은 3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정말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배워야 할 것은 하박국의 태도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게 도전적 질문을 합니다.  유대의 선한 왕 요시아가 므깃도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자를 돕지 못할 망정 죽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입니까?

도마는 의심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도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는 광야에서 최소한 8-10년은 예수에 대해서 깊은 고민과 의심을 하고 주님의 사역자가 됩니다.

오늘 날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맹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굴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시기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질문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의심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돌과 나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상에게는 절대로 의심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질문을 할 수도 없습니다.  돌과 나무와 같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굿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무당에게 질문하다 혼 나는 것을 봤습니다.  질문하면 신령이 노한다고 합니다.  입 다고 들으라고 할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죽은 것이기에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말해야합니다.

오늘 날 교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믿음의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의 예언서에서 우상숭배는 우상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을 알지 못하면 구약의 예언서는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질문하거나 의심하지 않으면 악이 선을 이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의심하면 하나님은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에게 질문과 의심의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미가 4장 -신자의 오늘과 미래

2-3장에서 가짜 예언자, 가짜 목사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가짜를 언급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짜, 거짓에 대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그러면 진짜는 어떠한 내용을 언급 할까요?

진짜, 예언자, 진짜 목사는 미래와 현재를 구분합니다.  미래에는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고난과 어려움과 시련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저명한 목사가, 교인들도 사람인데, 현재에 고난만 주어지면 어떻게 신앙 생활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100%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짓과 가짜의 차이는 우리의 현재 생활에 고난과 시련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100%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100% 가짜입니다.

목회자의 문제는 100% 축복과 100%의 고난을 동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서 엄청난 모순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교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러면 가짜들은 다음과 같이 교묘한 방법으로 교인들에게 책임을 전가 시킵니다.  이전에 약간 언급했지만, 이 부분도 교인들에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전도와 선교와 같은 헌신과 충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자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에 상급과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거짓의 영과 더러운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과 예배가 우리의 헌신과 충성이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조건과 자격이 된다면 이것은 오늘 날의 바리세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바리세인과 같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세인을 닮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으로 오늘 날의 한국 개신교 교회, 이민 교회, 아주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세상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신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국가에 대한 의무는 종교관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상실한 인간성이 없는 인간이 됩니다.

미가서 4장의 진짜와 가짜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4장 1-8절은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위로와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치리하고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4장 9절에서 13절은 현재 일어날 일입니다.  미가는 “이제”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날 일을 진짜 목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v.9-13)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v.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v.11)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이제. 영어번역은 Now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왕과 지혜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합니다.  들판에서 짐승처럼 살며,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추악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v.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v.13)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적들을,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는 자들을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으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것을 못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미래에 승리를 얻게 됩니다.  현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 눈으로, 삶으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확신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실 미래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현재, 이제 보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진짜 예언자, 목사입니다.  그러면 왜, 현재의 고난과 시련을 말해야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는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배와 기도와 그리고 경건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가 우리가 복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가짜 목사는 예배와 기도가 하나님의 복과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경건은 예배자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존재가 되기 위하여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좋은 하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