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3장- 하나님 계시의 흐름

구약에서 하나님의 예언은 2가지의 형태를 갖습니다.  첫째는 너희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의 죄로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언서에서 첫째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지합니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를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통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두 번째의 예언이 나타납니다.   너의 죄로 너희들이 이방의 포로로 끌려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하고, 남쪽 유대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2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예언의 내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v.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v.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검사가 재판정에서 피고의 죄를 지적해야 재판장이 심판을 합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그저 40일이 지나면 성이 무너진다고 할 뿐입니다.  니느웨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죄의 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성의 백성과 왕과 신하와 심지어는 짐승들도 금식하며 회개합니다.  그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합니다.

구약의 전통적 예언서의 첫째와 두 번째 예언과 심판의 과정이 무시됩니다.  또 하나는 사흘, 3일 동안 요나가 외쳐야 사람들이 듣는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단 하루 만에 사람들이 회개를 합니다.  회개를 기다렸다는 듯이 회개합니다.  자신의 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의 주권적 회개입니다.  은혜적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계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 통치 방법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 계명을 통한 계약적 관계, 율법적 Covenant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약의 관계가 은혜적 Covenant로 변경이 됩니다.  Covenant는 계약, 언약으로 번역되지만 성경적 의미는 양 당사자가 동등한 관계의 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손해 보시는 계약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하나님과 다윗의 은혜적 Covenant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다윗, 유대 지파와의 계약입니다.  이러한 계약이 모든 인류, 이방인, 이스라엘의 원수, 앗수르, 니느웨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 계시, Progressive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지역적 이스라엘에서 모든 인류와 민족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4장에 가면 요나가 이러한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날도 똑같은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없이 반복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문자주의는 자유주의 신앙에 반대해서 나타난 성경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지나친 문자적 성경해석과 그로 인한 경직성,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사상에 반대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주의는 문자주의를 탈피한 흐름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교회, 이민교회는 근본주의,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 하시는 계시를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학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을 죄악시합니다.  신학이 없는 종교는 무속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기복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 앞에서 책임지는 모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책임과 인식이 부재합니다.

구약의 예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언의 내용이 국가와 사회와 유대교에 대한 죄악의 지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끼리 세상에서 잘 먹고 복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약점을 감추려고, 보수도 아니면서 보수 신앙이라고 강조합니다.  한국 교회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과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요나서 2장 -하나님 앞에서 정직

우리들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다면 언제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들은 사람에게는 거짓이 본능적이라고 합니다.  모든 행동과 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짓이 있다고 합니다.  거짓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거짓에는 정당한 합리성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파서 약을 먹지 않는 아이에게, 약이 쓰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은 상대방을 속이지만, 긍정적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적에게 자신의 생명이 위험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거짓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속여서, 그 위험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거짓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거짓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삶이 악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무섭고, 두려운 것을 당한다면, 거짓을 말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가장 무서운 순간은 죽음의 직전입니다.  죽음의 문턱입니다.  저는 이때에 모든 사람이 가장 정직해져가는 순간이라고 봅니다.  가장 두려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모든 것, 고통과 아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두고 떠나기에 거짓도 두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거짓과 함께 갈 수 없는 곳이 죽음입니다.

요나는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음부 // 스올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기도의 내용이 매우 정직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기에 우리를 정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v.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v.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죽음에서 그는 니느웨 성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려 주신다면 그는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서, 회개를 요구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서 살고 싶은 열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죽음에서 // 음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는 1장에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큰 소리를 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사는 것이 최고의 희망과 소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갔다 오셨습니다.  요나가 스올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토함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감사와 승리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고, 환경을 비난 할 수 있고, 나의 부족으로 거짓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순교자을 죽이는 잘못된 강조

오늘 본문은 다니엘의 3 친구가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뜨거운 불속에서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이야기입니다.  느브갓네살은 2장에서 다니엘의 예언대로 자신을 순금으로 표현한 신상의 머리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 꿈의 해몽대로 자신을 상징하는 황금신상을 만들게 됩니다.  자신을 신격화합니다.  우상화합니다.

북한에 가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의 동상이 수만개가 된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신격화 우상화합니다.  그 동상 앞에 경건하게 절하고 불경건한 행동을 하면 바로 처벌을 받습니다.  만수대 김일성,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곳에는 신발의 덧신을 신고 들어갑니다.  강력한 바람을 사용해서 몸의 먼지를 제거합니다.

느부갓네살과 김정은 정권이 동질성이 있습니다.  사람을 신격화해서 우상으로 섬기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의 정권을 폭력으로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가장 허약한 정권이 이러한 우상화를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항상 자신들의 부화와 식민지의 반란을 걱정했습니다.  황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 넣겠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이러한 우상 숭배를 거절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죽이기 직전에 협상을 합니다.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신들을 건저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이 건져 주지 아니하실 지라도 신상에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3 친구들은 신상에 절하지 아니한 결과 그들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제가 지금 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우리 머릿돌 교우들은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일제의 우상 숭배를 거절하는 순교자의 피에 의하여 새워졌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도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순교자의 신앙에서 교회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의 치욕의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의 우상 숭배를 참여한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우상 숭배에 참여한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우상 숭배 참여자는 유명한 도나투스의 논쟁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시여 교회를 이끌어 왔을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다니엘의 3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 질 때에 다니엘은 어디에 있습니까?  (단 6장)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 질 때에 다니엘의 3 친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다니엘은 자신의 3 친구가 불에 던져 질 때에 함께 있지 않습니까?  왜 다니엘이 3 친구는 다니엘과 함께 사자굴에 있지 않습니까?  왜 성경이 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교회의 신앙을 누가 세워갑니까?  순교자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강조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은 우리들이 본 받을 것이지만,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순교자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순교자의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자격과 요건을 집어 넣으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는 이러한 강조로 신자들과 교회가 이원론적 우상숭배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교자의 신앙으로 교회의 모범을 세우고,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그들의 피를 절대로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나친 강조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우리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본받으며 살아야 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면 그들은 우리의 우상숭배로 전락합니다.  양화진에 있는 순교자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들을 또 한 번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다네엘의 3 친구와 같은 태도로 살고 있을까요?  그들은 죽지 못해서 치욕과 부끄러움으로 신앙을 지킬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순교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들이 있기에 교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시여, 교회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장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도식적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순교자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하지만, 그들을 본받는 것으로 신앙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부끄러움, 치욕과 고난이 함께 나타납니다.

3 사람이 불속에 던져져지만 불속에는 4 사람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한 사람을 신들의 아들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바로 그 고난에서 성령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저는 지금도 순교하지 못해서 사는 북한의 교인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성령이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상  가운데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좀더 깊고 넓은 생각을 해야합니다.  불속에 한 사람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