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3장-하루의 선택

본문은 하박국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심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에서 하바국은 감사합니다.

감사 할 것이 있어서 감사하다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사회적인 윤리성를 갖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에서 신앙적 감사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부모에게 감사 합니다.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감사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감사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면 신앙적 감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감사의 상대가 변화합니다.  부모가 인간적 대상에서 신앙적 대상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윤리성과 도덕성에서 신앙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하나님은 이방민족이라는 몽둥이와 채찍으로 하박국과 유대를 때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바국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간과 하는 것은 하박국의 감사가 윤리성과 도덕성의 단계를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1장에서 하박국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이 2장에서 믿음으로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들은 하박국은 3장에서 신앙적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감사 할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 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고 있느냐 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우리 문제의 해결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면 그 믿음은 조건부적입니다.  조건은 우리를 윤리성과 도덕성에 머물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것은 이미 2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은혜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오늘 날 수많은 신자들이 은혜의 대한 이해가 너무나 명목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수없이 외치며 믿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  조건부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은혜라고 합니다.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은혜는 감사와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은혜와 감사와 기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만, 시련과 고통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하박국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믿음으로 살지만 우리는 매우 무능력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시련과 고난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것이 윤리성, 도덕성에서 종교성입니다.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 짧은 말씀에 6 번의 없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완전히 빼앗긴 상태입니다.  정말로 감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사합니다.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즐거워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극과 극이 갈라집니다.  하루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이 나타납니다.  

예수로 살 것인가?  주어진 환경에서 따라 살 것인가?  하루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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