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12-14 (가치와 사랑)

(v.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세상의 상식과 수학적 계산, 경제적 논리에 맞지 아니하는 것이 99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는 것입니다. 99마리의 양과 1 마리의 양,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합니까?

99마리를 목장이나 안전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습니다. 산에서는 늑대, 곰, 들개, 양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99마리는 이러한 것들의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분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상징적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99마리가 산에 있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을 전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산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 했을 때에는 위험성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문과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상식과 가치는 우리와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v.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우리의 상식과 가치와 경제적 논리와 모든 것이 무너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세상의 윤리와 가치를 파괴합니다. 자식이 살인자라고 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살인자 취급을 않습니다. 그저 부모의 잘못으로 생각하기에 부모가 가슴을 칩니다.

99마리의 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양들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죄악성을 깊이 아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존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를 이기게 하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이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의도적 고난도 자초합니다.

1마리의 양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양입니다. 자신의 죄악성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자존심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죄의 비참함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죄악의 더러움과 비루함에서 우리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을 예수님이 주실 때에 우리는 가장 사람다워집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기고, 어려움도 스스로 자초합니다. 나의 죄악을 갚는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알면 그 길은 우리들이 세상을 이겨가는 99마리의 양이 됩니다.

(v.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죄와 세상을 이길 힘을 갖지 못한 한 마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99마리의 양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에 오늘도 산에 두고 계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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