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32-46 (인간의 존엄-1)

어제 Trump 대통령이 DACA program을 종료시켰습니다. 불법으로 부모를 따라 미국에 온 자녀들이 불법체류자가 됐습니다. 미국의 의회가 다루어야 합니다. 의회도 Schedule이 너무나 빡빡해서 다룰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몇 차례 나누어 본문을 다룹니다.

오늘 본문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고 헐벗고 병들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본 것이 작은 자 소자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양이라고 하며 하늘나라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소자를 무시한자들에게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면서 이들을 염소라고 하며 영원한 형벌로 내어 쫓습니다.

소자는 우리의 도움을 받지만, 우리에게 보상하거나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가 비유하는 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고대 시대의 노예와 불법체류자, 영주권자를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가 오늘의 미국과 미래의 미국을 이해하게 됩니다. 불법체류자나 영주권자는 시민권자에 의하여 법적 제한과 제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탄생지가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들은 도시국가를 이루며 살았고, 항상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전쟁을 해서 승리하면 노예를 얻게 됩니다. 노예는 국가의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에게 신분적 차이를 두고 그들을 짐승과 같이 다룰 때에 문제가 많은 발생합니다. 노예의 반란과 외부의 적과 내통하여 국가의 존립을 어렵게 합니다.  그러다고 전쟁을 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끝없이 토론하는 자들이 소피스트입니다. 노예를 짐승으로 볼 것인가 사람으로 볼 것인 가입니다. 어떤 도시들은 노예들에게 일정한 권한과 자율권을 주어서 함께 살아가는 정책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노예의 주인들에 욕심으로 국가의 존립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존립은 노예가 문제가 아니라 노예 주인이 (Demos 법적 보호를 받으며 투표권이 있는 자들) 문제이기에 국가의 정치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따르지 않은 현인,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인정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는 노예주인 Demo-Critic 정치적 발언권을 가진 시민들에 의하여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제도에 대해서 탁월하게 대응한 사람이 그리스의 Alexander 대왕입니다.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에게 정치적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노예를 탄압하거나 마구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노예에게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지만, 정치적 권리를 제한합니다.

그리스의 Alexander가 세계 정복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정복자와 다르게 노예에 대한 자율권입니다. 노예를 짐승에서 인간으로 보는 존엄성이 나타납니다.

로마제국도 Alexander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노예를 짐승과 같이 다루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로마도 노예와 지배국가에 대한 착취와 탄압이 결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노예들에게 군대복무의 기회를 주어 시민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 날의 미국의 영주권 제도와 DACA program은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마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나 로마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미국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입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구호중의 하나가 Blood and Soil,피와 땅입니다. 백인들이 피를 흘려서 Indian과 Mexican과 싸워서 미국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주인은 백인들이라고 합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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