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 3-10 (양심과 은혜)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당시의 돈 은 삼십은 은으로 삼십 개가 아닙니다. 은은 돈을 의미하기에 은 삼십은 소 한 마리 또는 노예 한 사람의 값입니다.

금액으로 봐서 가롯 유다는 돈에 욕심을 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을 배신 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사회적 Messiah가 되지 못한 분노와 절망에 기인합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 한 후에 자신이 무죄한 자를 팔았고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는 (v.3) 스스로 뉘우쳤다고 합니다. 영어번역은 Repented himself, Repent, 회개했습니다. 양심의 회개를 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고통으로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으로 고통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양심의 고통을 당했지만 그는 인류역사에서 배신의 상징적 인물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양심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볼 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에 차라리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양심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속여가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기에 양심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양심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기에 기본적 양심을 지켜야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중요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과 악에서 갈등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가롯 유다의 사촌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이 전형적 인본주의입니다. 우리의 양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결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가롯 유다입니다. 인간의 양심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 모두 양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양심은 모순과 죄악의 덩어리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닭이 울 때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도 양심이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양심 불량입니다. 그는 너무나 뻔뻔합니다. 주님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지키지 못합니다. 주님을 3번 부인합니다. 그러나 그는 가룻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식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양심 불량의 인간을 교회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우리들이 양심불량으로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양심과 비교 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뻔뻔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양심 불량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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