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2장 10-19 (2 번째 축복)

학개서는 1-2장의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 신앙의 전체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서 종말까지 비유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지어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성전을 짓기 전, 유대인들의 실상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v.12-14)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v.13)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v.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이 일반적 음식, 국, 포도주, 올리브 기름에 접촉하면 하나님의 제물은 부정합니다.  죽은 시체를 만지면 그 사람은 부정합니다.  이렇게 부정한 것을 하나님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러한 부정의 결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질병으로 생각했습니다.  국가적으로 는 전염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피부병이나, 안질과 같은 질병으로 맹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라한 심판의 하나로, 경제적 가난으로도 그들의 죄악과 부정을 심판하십니다.

(v.16-17)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v.1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지었지만, 그 결과는 거의 없습니다.  각종 재앙으로 다 빼앗깁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자연재앙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하면 이러한 재앙에서 벗어나고,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신화적 구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끝없는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존재 확인은 이러한 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과 우리의 이성과 지식이 발달을 해도 우리들이 해결 할 수 없는 것의 하나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고단함과 고통입니다.  현대인의 허망과 불안, 삶에 대한 무의미는 이 시대의 최고의 사회문제입니다.

오히려 고대 사회에는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도 문제가 되지만, 성경의 사건을 현대의 지식의 진화적 입장에서 해석을 하는 이 시대의 지식과 이성도 큰 문제가 됩니다.

모든 인류의 신화나, 철학이나, 윤리와 도덕은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합니다.

서양은 나의 내면에서 다른 사람과 인격적 관계에 중심을 둡니다.  이러한 인격성은 그리스 신학이나 서양 철학의 근본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이 신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을 정도의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은 인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분노하고 배신하고, 슬퍼합니다.  결국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은 나의 내면에서 나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의 세계로 치우칩니다.  장자와 공자가 대표적입니다.  장자는 자연적 흐름을 절대로 거스르지 않습니다.  자연과 나의 일치입니다.  매우 관념적입니다.  또한 공자도 나의 완성을 너와 사회와 국가를 봅니다.  나는 절제하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도덕의 근본입니다.  그럼으로 타인의 잘못도 나의 잘못입니다.  자식의 잘못도, 왕의 실정도, 부모의 효도도 나의 부덕입니다.  그럼으로 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입니다.  계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5천년전의 하나님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그 계시성은 우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고난과 시련과 질병을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도 해석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무관하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로도 봅니다.  이것이 성경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계시성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치명적 실수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하나의 신비적 사건으로 해서 문제와 고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용을 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이러한 신비적 계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합니다.  이것은 매우 기초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실체를 가장 무지한 자들에게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은 내일 학개 마지막에 나타납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승리입니다.  최후의 영광입니다.  문제는 오늘 날의 교인들과 교회는 이것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종교가 현세구복의 일반적 종교로 전락을 했습니다.  인생의 문제의 답을 기도와 성경으로 찾으라고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불교와 서양의 철학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기도와 성경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독교의 최종적 계시가 아닙니다.  최종 계시와 하나님의 영광은 종말이고, 그 종말을 준비하는 우리의 변화입니다.

    (v.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성전을 지으라고 합니다.  성전은 우리가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2장 첫 부분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거룩해져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 하나님의 영광을 맞이하려면 현재에는 거룩해져가는 인격과 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골 3:3-1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v.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v.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v.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v.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v.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v.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v.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이것이 신앙의 요체입니다.  4절에 하나님의 영광중에 나타날 때에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와 교인들은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기독교는 종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길로 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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