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2장 20-23 (마지막 축복: 신학의 축복)

학개는 마지막 예언을 받습니다.  내용은 아주 짧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흔드시고, 세상의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학개를 구원하십니다.

(v.20-23)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v.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v.22)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v.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종말,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오늘 날 교회는 예수 믿고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을 교회 자체가 희석화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주변 사람들 중에 예수 믿지 아니했기에 그들이 지옥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믿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요?  신앙고백의 부제입니다.  한국교회의 치명적 약점은 신앙 고백이 없습니다.  신앙 고백은 내가 믿는 하나님,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역사성을 갖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지금까지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신앙고백을 해왔습니다.  신앙 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철학을 기반으로도 할 수 있고, 세상의 과학과 지식을 차용 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역사적 사건을 차용 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기독교를 사상적 체계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신학은 감정과 신앙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학은 교인들을 이념화 시켜 메마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합니다.  신학은 우리에게 신앙을 전체적으로 이해 하는 안목을 허용합니다.  신학은 우리의 신앙의 균형을 찾아줍니다.  신학은 우리들이 이 시대에 신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합니다.  신학은 개인이 성경을 작위적으로, 체험적으로 이해해서 신앙이 변질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한국 교회를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복음주의는 성령 체험을 강조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전도와 선교에 강조합니다.  회개를 강조합니다.  교회의 헌신과 충성을 강조합니다.  신자 각자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령 체험은 각자마다 다릅니다.  성령 체험을 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하게 성령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주관적입니다.  공통성을 갖지 못합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이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만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용해서는 안 될 단어이지만 각 개인의 영적 파워가 강조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없어집니다.  거의 이단수준으로 발달합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한국 교회의 자랑이 선교와 전도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교회의 사명과 원칙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없기에 교인들이 선교와 전도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이 선교와 전도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나타나는 것이 성과주의입니다.  선교와 전도의 결과가 나타나야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그 결과 한국교인들의 치명적 약점이 나타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신자답게 사는 거룩한 행위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교인이지, 자식의 아버지와 엄마가 아닙니다.  가정이 교회로 변질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교회 이탈이 가속화 됩니다.  자녀들에게 엄마와 아버지가 거룩함, 성실함, 진지함이 없는 신앙인으로 나타납니다.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초법적인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부 목회자들의 교회 성장의 도구와 수단이 되면서 선교와 전도가 교인들에게 염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신학의 부재로 나타나는 신앙고백이 없는 이유입니다.

신앙고백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적 통치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종말, 구원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신앙고백, 신학적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2 천년 교회 역사에서 그때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신학적 성찰에 의한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지켜오셨습니다.

니카아 신조, 사도 신경, 하이델 베르크 신앙 고백, 제 2 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바르멘 신앙고백, 1967년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우리들이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과 주체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천당, 구원, 하늘나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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