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27-30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Max Weber)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생활을 먼저 한 사람이 있지만 나중에 믿는 사람에 비교해서 못 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 나중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태도와 신앙을 돌아보는 경고의 말씀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한은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구별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으로 이러한 논리를 더욱 강화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비정한 종교라는 공격도 받지만, 매우 성경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개신교, 장로교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 받은 자에게 현실적 책임을 부여합니다.  청지기 정신입니다.  예정론을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해 놓으셨기에 우리들이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착각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무지와 오해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에서 요구되어지는 것은 구원 받은 자의 청지기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확장시키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캐톨릭은 물질과 성공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습니다.  장로교, 칼빈주의자들은 반대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개신교와 캐톨릭 국가들은 종교적 이유로 경제적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개신교 국가들이 캐톨릭 국가에 비교하면 뷰유합니다.  같은 국가안에서도 캐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의 수입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경제에서 그는 개신교 자본주의을 확신합니다.  그는 경제적 번영이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다른 말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오늘 날의 자본주의의 탐욕은 이러한 정신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Max Weber가 주장하는 기독교 윤리가 사라질 때에 우리는 자본주의도 지키지 못 할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자본주의가 인간의 최고의 경제제도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나중되고 먼저 되려면 우리의 경제 활동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경제 활동에 윤리적 행동을 실천해야합니다.

One Reply to “마태복음 19장 27-30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Max Weber)”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