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 1-16 (예수님의 자본주의)

Karl Marx (칼 마르크스)는 영국의 산업 혁명과정에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와 어린 아이들이 노동현장에서 당하는 비인간적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수학, 물리, 과학, 철학등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을 위하여 정상적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는 타락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약자와 가난한자의 종교였고, 인간을 위한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억압당하는 자의 하나님이며, 착취자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시간이 가면서 인간에 의하여 변질된다고 합니다. 중세의 교회는 왕과 영주를 위한 종교로 농민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종교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억압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가 미래의 천국을 강조하면서,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인민, 노동자에게 환상적 미래를 종교적 목표로 만들어 버리기에 인민은 종교라는 아편에 취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진화론에 의한 종교의 변질과 타락은 러시아의 레닌에게는 진리가 됩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의 타락은 마르크스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공산혁명의 선두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 종교의 타락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돈이 종교이며 돈이 신이라고 갈파합니다.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본주의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돈을 신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인민은 종교에서 해방이 된다고 철학적 논리를 갖게 됩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과 사회적 성공은 마르크스의 비난과 조롱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명문 가정이 된다는 설교는 기독교를 자본주의 일부로 예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저질 목사는 말씀의 강단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 신자들은 반성해야합니다. 이러한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신자들은 기독교를 저질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식한 목사를 교회 강단에 세워서 자신들에게 위로와 힘을 얻으려면 교인들은 이 시대에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 신학과 정신에도 맞지 않는 미신적 행위입니다.  그 결과 일부 교회와 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교회와 교인들이 됩니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자본가, 농장의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v.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주인은 일꾼들에게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그는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저녁 5시에도 일꾼을 찾으러 갑니다. 그는 오후 5시 만난 사람에게, 왜 여기서 놀고 있느냐고 합니다. 우리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오후 5시에 돈을 주고 품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병들었거나 늙었거나 무능한 노동자들입니다. 주인은 그들을 노동자로 사용합니다.

오후 6시가 되자 임금을 지불합니다. 가장 무능한 자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 받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 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들은 오후 5시 보다 거의 11시간 이상을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이에 대해서 일찍부터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왜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주지 않는 가입니다. 그들이 매우 정당한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모든 노동자는 노동시간에 따르는 임금은 평등해야합니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자본가로 평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렇게 임금을 주는 태도는 아담 스미스의 노동자는 상품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노동 가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노동자에게 포도원의 일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들이 일을 해서 하루 생계를 유지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돈을 주는 목적으로 일꾼을 찾아다녔습니다.

당시의 노동자는 한 데나리온이 있어야 한 가족이 하루의 식사와 생계를 해결 했습니다. 만약에 아침 일찍 온 사람들과 비교해서 돈을 주면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가족은 굶습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오늘 날의 자본주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하늘나라의 자본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자본주의는 이 시대의 경쟁관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행동 할 수 있는 경제체계와 거리가 있습니다.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되는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은, 천국은 이러한 경제체계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천국, 미래의 경제체계가 이러하다면 우리들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늘 나라의 자본주의대로 살아가려고 우리는 발버둥 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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