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30-35 (배신자)

미국이 살아가는 것이 점차로 팍팍해집니다. 과거에는 저임금에 유색인종들이 많이 일을 했지만 이제는 백인들이 일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동네 식당에 가보면 백인들이 많이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거와 같이 여유 있는 미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속담에 광에서 인심이 난다고 합니다. 내가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여유가 있습니다. 여유가 없으니 인심이 사나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소유에 의해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소유의 부족은 불안과 염려이며 소유의 풍족함은 여유와 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소유물로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소유해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해방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소유에서 대표적으로 실망한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소유는 유동적입니다.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소유가 많든 적든 그 소유로 인하여 항상 불안합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v.31-a)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린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나를 소유물로 여기며 이제는 필요 없기에 버린다고 하십니다.

제가 어제 제자들도 가롯 유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버린다는 Hella로 Scandalizo입니다. 범죄, 죄를 짓는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의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v.33)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말은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만은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왜 예수님은 닭이 3번 울 때라고 합니까?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모든 죄를 용서 받는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닭을 잡아서 속죄의 제물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포로가 되면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성전이 없기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특히 바벨론의 포로들은 대속죄일을 당하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닭을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지금도 이러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닭이 3 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새벽 시간에 나를 부인한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는 베드로가 주님을 3 차례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닭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속죄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배신자의 제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유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배신자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자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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