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47-56 (닭이 울때 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입니다.

(v.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가룻 유다는 자신과 입을 맞추는 자를 잡으라고 합니다.

Kiss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가롯 유다의 Kiss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그 배신감으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시자 자신의 양심의 질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는 주님이 하늘의 힘을 빌어서 로마와 대항해서 유대인들에게 정치와 경제와 자유를 주는 Messiah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는 제자 중에 유일한 유대출신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의 유대 지역과 갈릴리 지역은 극심한 지역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지방색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다른 제자들의 왕따가 극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극복합니다.

그를 가롯 유다라고 합니다. 가롯을 Iscariot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단검입니다. 그는 유대의 열심 당원이였을 것입니다. 조국을 침략한 로마의 군인들과 조국배신하는 자들을 단검으로 죽이는 자들입니다. 그는 모세와 바울과 같은 애국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돈 궤를 맡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부 출신입니다. 어부는 땅을 빼앗긴 자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직업입니다. 그들은 아주 무지했을 것입니다. 글을 몰랐거나, 돈을 계산하는 산수를 잘못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웠기에 돈을 맡았습니다.

그에게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혁명을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그의 기대와 상반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이 시작됩니다. 그의 실망은 향유 사건과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은 오로지 가롯 유다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으로 오늘 본문에 기가 막힌 표현이 있습니다.

(v.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롯 유다를 열 두 제자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수사학적으로 열둘에 하나가 포함됩니다. 12과 1는 차이가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롯 유다와 같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고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 베드로는 왜 칼을 갖고 겟세마네 동산에 갔을 까요? 베드로도 겟세마네에서 유대의 혁명이 시작되기를 기대 한 것은 아닐까요? 혁명의 주체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보호한다는 것은 그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도 됩니다. 그럼으로 그는 칼로 말고의 귀를 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체포를 당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체포한다면 제자들도 당연히 체포해야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하인들은 제자들을 체포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v.54)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v.56)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성경이 선지자의 글로 이루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단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Adam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가롯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배신자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다른 사람은 가롯 유다이고 나는 주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철저하게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그럼으로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닭은 고대사회의 시계의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시계로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배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닭을 시계로 사용하셨습니다. 닭이 첫 번 우는 시간이 아닌 다음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닭이 울때마다, 시간마다, 때마다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우리들이 끓임 없이 하나님을 배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고, 예언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닭이 울고 있습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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