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35-39절 ( 찾아오시는 은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보고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보고에 주님의 반응이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고 다른 마을에서 전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다면 예수님을 찾아오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찾지 않는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합니다. 다른 마을은 예수님의 전도를 방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비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한글번역은 전도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Evangelism,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영어번역의 전도는 Preaching입니다. Hella로 케룻소입니다. 설교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보고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케리그마입니다. 하나님의 대하여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왕의 전령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면 왕은 자국의 국민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전쟁의 결과를 알려줍니다.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백성들은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적국의 포로를 노예를 얻습니다. 농사나, 모든 일에 추가 노동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하면, 백성들은 적국의 노예가 됩니다. 식민지 백성이 되어 착취를 당하거나,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게룻소입니다. 설교, 케리그마가 됩니다.

본문의 전도는 왕과 군대가 어떻게 전쟁을 했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내용에 따라 백성들이 미래가 결정됩니다.

왜 주님이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까? 일방적 선포입니다. 우리의 양해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승리의 소식을 듣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는 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사라집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며,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오늘을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분을 갖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자리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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