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장 1-24절 (최초의 이방 선교사와 선교의 방향)

거라사의 광인은 지난 수요일에도 설명을 했기에 생략합니다.  이 지명은 성경에서 가라다라고도 부릅니다.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돼지 2천 마리가 몰사했다면 이방인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높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돼지들이 산에서 비탈로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비탈의 원문은 절벽입니다.  영어번역은 Steep place 입니다.

갈릴리 호수 반대편, 이방인 지역이 되며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호수 중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이방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던 귀신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v.18)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9-20)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v.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데카볼리는 데카 // 10개의 // 볼리 // 폴리스 // 10개의 이방인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최초의 이방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예수님의 선교방법이 나타납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이방인이고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와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이방인의 사역자를 세웁니다.

바울도 선교했지만, 그 지역의 사역자를 세웠습니다.  그의 선교 기간과 교회의 머문 기간을 측정하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는 아주 짧게, 열흘정도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약 1-2년 정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통과 거리를 생각하면 바울은 선교지에서 그 지역 출신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거라시의 광인은 교회의 미래와 선교에 대한 귀한 지침과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는 자를 두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미래는 그 지역이 교인들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교 방향을 잘 알려 주십니다.

2 Replies to “마가복음 5장 1-24절 (최초의 이방 선교사와 선교의 방향)”

  1. 해외선교가 교회의 주된 사역 중 하나가 된 한국 교회 현실에서 마음 깊이 새겨둘 말씀으로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선교의 본 목적과 효과를 생각할 때 주님 가르침에 따른 선교의 대표적 수혜자가 한국 교회가 아닐까 합니다만… .

    1. 맞습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에 빚을 진 것은 맞습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근대의 정신을 갖습니다. 또한 교회는 선교제일의 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은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지만 선교 사명이 교회의 본질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교회의 사명은 신자들이 십자가의 영광으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와 교인인들은 선교 사명을 행동 함으로 본질, 하나님의 요구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요구는 하시는 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성령의 열매로 인격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나의 현실에서 십자가의 삶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우리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의 사명을 받은 자들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선교사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가정 주부로, 직장인으로, 아버지로, 학생으로 ,
      사업가로 목회자로, 사회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선교보다 더 중요한 사명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선교사로 사는 청지기의 사명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것을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가 교회의 사업으로 변질합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인격의 변화가 없는 교회의 선교사로 살아갑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고생하고 고통을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로하시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인 모두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2-3만명의 선교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백만의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교인 선교사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세인들이 엄청난 선교와 전도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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