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 17-21절 (배신의 꽃)

인간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배신감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 당합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실망합니다. 책임을 져줄 줄 알았던 사람이 책임을 회피 할 때에 배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배신자에게 참지 못합니다.

그러면 배신을 유발한 내 자신은 잘못이 없을까요?  그를 배신의 행동을 하게한 나의 잘못은 없습니까?

가룻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의 배신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에게 잘못하 것이 없습니까?

본문을 다른 복음과 비교해보면 제자들도 가롯 유다의 배신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방조했을 것입니다.

 [막 14:18-막 14:20]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v.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v.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이 근심하며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근심하다의 KJV 영어번역은 Sorrowful 입니다.  정말로 미안해합니다.  정말로 슬퍼합니다.  왜 Sorrowful  단어를 사용합니까?  I am so sorry for that.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의 실수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도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졸개들도 법적 처형을 당해야 합니다.  단 한명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유대 출신 가롯 유다에 의하여 제자들의 배신을 전제로 하여 제자들은 신변을 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했을까요?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배신에 침묵하거나 방조했을까요?

예수님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이 소원과 희망이 되는 예수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되시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입니다.  자신들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소망을 꺽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잘못입니다.  이러한 실망과 절망이 예수님을 배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에 가롯 유다가 앞장을 서게 됩니다.

우리들이 배신자가 될 때에는 예수님이 잘못하신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나타날 때에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묵상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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