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7장 1-14 (마른 뼈에서, 생기에서, 성령이 임하는 모습)

 

오늘 성경에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3차례 대언하면서 1). 마른 뼈가 사람이 되고 2). 생기를 얻으며, 3). 하나님의 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말씀이 됩니다.

뼈는 아주 말랐지만, 듣는 귀가 있습니다. (v.4-b)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매우 상징적입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들을 것을 듣지 못하기에 마른 뼈가 됩니다.  오늘 날의 마른 뼈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때론 정말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다면 나에게 이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믿음으로 나의 현실을 이기기에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나는 감사할 능력도 없고 기도 할 마음도 없습니다.

이 모습이 심히 “아주 말라버린 뼈”의 모습이 됩니다. 세상은 이 말라버린 뼈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나의 인생은 세상의 마른 바람에 말라 갈 뿐입니다.  왜 아주 말라버린 뼈가 됐습니까? (v.2-b)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고” 뼈가 아주 마른 것을 강조 합니다. 뼈가 왜 아주 말라버렸습니까? 여기서 말랐다는 의미는 Hebrew로 보면 습기가 없어서 마른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꽃에 물이 없어서, 나무가 물이 없어 말라 죽는 것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유대인에게 습기,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나의 인생이 마른 뼈가 됐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때입니다. 더 이상 견뎌낼 힘도 없는 마른 뼈와 같은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비)가 임 할 때입니다.

두번 째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우리에게 습기를 주십니다.  생기가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마른 뼈와 같이 내 인생이 죄로 뒤덮이고, 병들었을 때에 주님은 찾아옵니다.  아주 말라버린 뼈에게 들려진 첫 번 음성은 (v.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뼈와 뼈가 마주치며 연결 될 때에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낫을 것이며, 힘줄이 생기며 살이 오를 때에는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으며, 가죽이 덮일 때에는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v.8-b) 생기가 없습니다. 여기서 생기란 어떠한 신체적인 활발함을 뜻하는 생기가 아닌 하나님이 창조 때에 아담에게 부어 주신 생령을 뜻합니다.

본문은 사람의 육체에 대해 매우 독특한 말씀을 합니다. Hebrew로 육체를 Basar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단어를 짐승에도 동일하게 씁니다. 사람을 새와 육츅, 땅에 기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사람이지만, 생령이 없으면 짐승이 됩니

하나님은 생령이 없는 사람을 성경은 육축, 짐승으로 봅니다.  한 젊은이가 철학자 디오게네스에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어떤 짐승에게 물리는 것이 가장 위험한가요?” 젊은이는 짐승의 이름을 듣기 원합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의 대답은 “밀고자의 이빨이 가장 치명적이고, 아첨꾼의 이빨이 가장 무섭다” 합니다. 사람의 이빨이 짐승의 이빨보다 무섭고 치명적인 이유는 자신의 본능과 욕심에 따라 갈 때입니다.

생령이 없는 인간은 짐승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이 있다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만, 짐승은 죽음 이후에 관심이 없습니다. 개에게 지옥과 천국은 없습니다. 저 날아가는 새에게 영생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며 자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정말로 짐승만도 못한 삶이 됩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내가 준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v.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왔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공간적인 임재를 뜻합니다.

(v.9)에서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무엇이라 합니까? 이 사망을 당한 자가 됩니다. 뼈에 힘줄과 살이 올라도 생기가 없으면 사망을 당한 자, 죽은 자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어주신 영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단어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는 힘을 뜻합니다.

 

3 번째 말씀이 임합니다.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무덤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고향 이스라엘의 땅으로 들어가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음과 관계없는 인생이 됐습니다. 우리들이 갈 곳은 저 하늘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의 인생을 어디에 묶으시겠습니까? 이 땅에 내 뼈룰 묻기에 내 인생을 이 땅에 묶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길의 동반자를 하나님의 신을 우리 속에 두신다고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 하나님의 신이 이 좁고 좁으며, 바늘하나 꽃을 곳 없는 강퍅한 마음에, 추한 내 삶에 들어와 계신답니다.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하신 성령이 나의 좁은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기억하시며 사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36장 16-38 (두개의 장면)

저는 2 개의 장면을 봤습니다.

첫 장면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쟁이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Sanders가 Hillary에게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패배했습니다.  불과 0.5%의 차이입니다.  왜 이렇게 근접한 차이가 났을까요?

그 이유 중의 하나는 Millennials Generation 때문입니다.  한국말로 적당한 번역을 모르겠습니다.  그저 밀레니얼 세대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알고 싶으면 Goldman-Sachs Web-Site에 들어가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80~2000년 태어난 세대로,  8,000만명에 이릅니다.  그 어느 세대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이들이 Hillary에게 10% Sanders에게 90%을 투표했습니다.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맹목적으로 반대한 것과 같습니다.  매우 극단적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첫 번째는 차를 사지 않습니다.  소유를 거부합니다.  차가 없는 도심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 우버같은 자동차 공유 서비스가 발달합니다.  앞으로는 자동차가 개인 명의가 아닌 공동 명의가 될 것입니다.  경제적 독립이 어려워 부모와 함께 사는 세대입니다.  매우 가난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부유함을 조롱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건강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건강을 해치는 Junk food와 Cola을 마시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터넷 동영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TV을 보지 않습니다.  백화점 에서 물건을 사기보다 On-line구매를 합니다.  이들이 집을 구입하는 나이는 아주 늦어 질 것입니다.  현재보다 세대보다 15년 늦게 자신의 집을 갖게 됩니다.  주택 시장이 침체 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 대한 죄의 분노와 질책입니다.  그들은 서로 갈등하고 분노했습니다.    [겔 36:17-20]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의 시대는 세대간의 갈등이 심화 될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혁명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Ronald Ragan  대통령이 시작한 신자유 정책과 Internet의 발달은 새로운 혁명을 초래했습니다.  신자유정책은 중산층의 파괴로 가난을 불러왔습니다.  이 가난을 참지 못하는 세대가 Millennials입니다.  그들은 가난에서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무시합니다.  부유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결과 부유함도 무시합니다.  모든 것을 무시합니다.  기존의 정치도 무시합니다.  부모도 무시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그 정보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을 동시적으로 수용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오늘 날의 영화입니다.  Tracer 이라는 영화를 보면 도시에서 원숭이와 같이 사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선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이기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전형적 Millennials 시대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겔 36:24-28] (24)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저는 아침에 또 하나의 장면을 봤습니다.  태어나자, 죽음을 맞이해야 할 백인 어린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 아기의 엄마는 그 아기의 심장을 기증합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심장을 받은 아이는 4살된 흑인 아이을 만납니다.  자신의 아기의 심장을 기증한 엄마가 청진기로 흑인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그 심장소리는 자신의 사랑하던 아기의 심장 소리였습니다.  죽은 아기이지만 그 심장은 살아 있습니다.

그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는 엄마가 웁니다.  흑인 아기의 엄마도 웁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혁명중입니다.  갈등과 분노로 혁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중에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혁명을 잠 재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분노와 아픔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하는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끝 자락을 잡고 오늘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님의 옷 자락을 잡은 여인과 같이 그 사랑을 잡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두개의 장면에서 아침을 시작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에스겔 36장 1-15 (관심과 의리)

어제 Fox News 주최로 Iowa 공화당 후보 토론이 열렸습니다.  트럼프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치 평론가의 말대로 공화당의 상징 코끼리가 없는 토론장이 였습니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상징 코끼리가 됐습니다.

트럼프가 참석하지 아니해서, 다른 후보들은 그야 말로 땅콩들의 키재기였습니다.  Fox News에서는 트럼프를 참석시키려고 각종 협박을 했지만, 트럼프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어제 토론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침례교 목사이며, Arkansas 주지사였던 Mike Huckabee는 기각 막힌 행동과 말을 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몇 년 동안 자신의 이름을 딴 Huckabee News show을 Fox News에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번 Iowa debate에 트럼프가 참석하지 않으니 Fox News에서 토론 하는 것을 볼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다른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리입니다.  신자들의 태도입니다.  나와 관계가 없으면 의리를 지킬 이유도 없습니다.  나의 이익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공격 할 수 도 있습니다.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그것은 나와 무관합니다.  적도 됩니다.

오늘 날 한국 이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어제의 형제에게, 자신과 조금 다르다고 돌을 던집니다.  사실 다른 것도 없습니다.  똑 같습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다고 해서 돌을 던집니다.  그리고 다르다고 합니다.  오늘 날 교회에 만연된 행동입니다.  나와 다르면 적이 되고 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원수가 됩니다.

우리들이 아주 답답한 일을 당해서, 어디에 하소연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나를 이해 하지 못 할 것 같고, 말 할 수 없는 사정이라면 차안에서 소리를 치거나, 하늘을 향해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끝가지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을 산과 들판, 사막과 시내물에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파괴된 성읍들에게 말씀하십니다.

 (v.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에 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질투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치를 당하였음이라.

하나님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수치와 어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거부하고 믿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산과 들판, 사막과 시냇물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을 바꾸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v.9)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하나님이 돌이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켜, 관심을 가지시며 말슴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말씀하시던 산과 들판, 사막과 시냇물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0절 부터 1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승리와 영광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의리를 키켜야합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목사라고 하면서, Mike Huckabee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일이라도,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흉내라도 내야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의리를 지키며,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35장-함께 산다는 것

우리 속담에 아흔 아홉 섬 가진 사람이 한 섬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욕심이 지나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나도 잘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공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공생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 것이 자신이 더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화를 자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에돔을 심판하십니다.  에돔은 앗수르나 바벨론의 공격에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봤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끌려가고 남은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입니다.  이삭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멸망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에돔을 철저하게 징계, 심판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v.10)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그 땅의 주인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계셨던 곳이라고 합니다.  Even though I the Lord was there.  영어번역을 보면 하나님이 2 번 강조됩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날의 이 시대의 생존의 방법은 공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공생을 거절합니다.  이 세상이 날로 경쟁이 심화되기에 공생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택하면 우리는 아주 잘못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것도 아니며 북 이스라엘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것에 욕심을 내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욕심이 사망을 낳습니다.

오늘도 하루 자족하시고, 다른 사람과 공생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34장

이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화두가 양극화입니다.  지난 주에 Obama 대통령이 오늘 날 미국의 양극화를 개탄했습니다.  정치가 극우와 극좌로 양극화됩니다.  민주당에서는 Hillary보다 극좌파, 사회주의자 Sanders에게 패배 할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화당에서는 극우파인 Trumph가 후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에 뉴욕 시장이였던 Bloomberg가 대선에 나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는 무소속으로 과거에 공화당 민주당 당적을 가진 중도파이기 때문입니다.  양극화의 중재를 중간, 중도가 하겠다고 합니다.

경제적 양극화도 심화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경제 분배의 양극화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자본과 경쟁을 할려면 자국의 자본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중산층의 붕괴는 필연적입니다.  중간 중도는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극화에 대해서 우리는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절충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양극화에서 또 다른 양극화를 만들어냅니다.  절충점은 결코 해답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혁명과 전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왔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다툼으로 해결해왔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문제 해결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제사장, 서기관들을 목자라고 합니다.  오늘 날의 목회자를 목자라고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목회자들, 목자들의 타락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목자들의 타락을 질책합니다.  그 결과는 양들과 양들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목자들 때문에 양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v.20-2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잘못된 목자로 양들과 양들이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잘못된 지도자로 양들 사이에서 양극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양극화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자들의 죄악과 양들의 분열, 싸움을 참을 수 없기에 새로운 목자,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약속합니다.  (v.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좋은 목자, 선한 목자만 이러한 양극화를 해결합니다.  그 결과 그 양들은 (v.28)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왜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합니까?  혁명과 전쟁이 아닌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길기에 쓸 수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수요 예배에 설교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33장 21-22 (서산에 지는 미국의 기독교)

어제 미국 방송에서 가장 크게 다룬 뉴스의 하나는 Donald Trumph의 발언입니다.  자신이 뉴욕 5번가에서 누군가를 총으로 쏴서 죽여도 자신의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강해진다고 합니다.  지난 6월 이후 트럼프는 논란이 되는 발언으로 지지율아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의 뉴스 평론가들도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Trumph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트럼프는 고린도 후서를 다음과 같이 선거 연설에서 표현을 했습니다.  Two Corinthians라고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2 Corinthians로 표기되어 있기에 그대로 읽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고린도 후서는 Second Corinthians로 읽어야합니다.  우리는 트럼프가 얼마나 성경에 무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News anchor들이 트럼프의 지지자들을 말 할 때에 반드시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Conservative Christian입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람을 죽여도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후보의 지지율에 미국의 크리스찬들이 일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제목을 비상식적으로 읽어도 크리스쳔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합니다.

각주: Conservative Christian (보수적 기독교인) 라는 단어는 미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근본주의에 대항해서 미국의 복음적 지도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Billy Graham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도 미국에서 아주 오해되어져 사용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가 가장 남용하고 오해하고 악용하는 단어입니다.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에 가깝습니다.  아직도 신학적으로 Conservative, 보수적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후진적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이해해야합니다.  

오늘 본문 21-29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자의 태도입니다.  나라가 망했고 자신의 동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자들의 땅을 불법으로 취득합니다.  그들의 아내를 강제로 취합니다.  사회적 윤리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피 있는 제물을 먹으며 우상을 섬깁니다.  종교적 타락을 보여줍니다.

30-33은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자신이 이익만을 취합니다.  그들도 윤리성과 도덕성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슬픈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역사적 혜안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이번 선거로 미국의 소위 Conservative 기독교는 막을 내릴 것입니다.  특히 백인 보수층의 권한과 발언은 매우 약화 될 것입니다.  미국의 기도교는 윤리성과 사회성을 상실했기에 종교로서 일반적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기독교의 약화를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 할 수 없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의 Lutheran들은 Hitler을 메사야로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Roman Catholic이 히틀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두개의 종교는 철저하게 역사적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종교의 철저한 약화를 갖고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독재정권에서 저항한 Catholic은 미약한 교세에서 아주 강한 교세를 지니게 됐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일제 36년에서 Catholic의 저항이 미미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초반에는 독재에 항거하지만 후반에는 정권과 결탁을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국회의원과 정권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적 직하로 쇠락을 합니다.

미국의 선거를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깊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실 생활에서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 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미국의 Conservative Christian, 보수적 신자들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이 세상을 구별하는 신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33장 1-20 (진정한 아픔)

본문의 배경은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중에 예루살렘의 패망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됩니다.  에스겔은 선지자, 예언자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경고를 알려 주는 영적 파숫꾼입니다.  하나님은 유대가 망하는 것의 책임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경우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파숫꾼은 적이  공격할 때에 경고를 해줍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생명도 구하지만 상도 받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파숫꾼의 경고를 무시하면 파숫군의 책임은 없습니다.  셋째는 파숫꾼이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아니하면 ,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기에 파숫꾼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파숫꾼을 Prophet 라고 합니다.  미래를 보고 앞을 보고 예언을 합니다.  그러나 Prophet의 Pro는 대신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Phet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배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를 지나서 사사기를 지나서 사무엘에 이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받지만, 예언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전-Oral tradition을 나중에 책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대의 멸망에 나타납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요?  예언서는 글로 써진 것입니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이 받아 적으라고 하는 말씀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즉 글짜의 발명입니다.  글짜는 한 문명과 문화에서 대화, 거래, 법적 집행들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4 대 문명의 발생지의 공통점은 강, 물과 글짜입니다.

이렇게 글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면서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질타하는 것이 제사장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입니다.  성전 제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성전 제사가 지겹다고 하십니다.  지난  수요 예배에도 이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성경의 후반부는 제사장이 사라지고 예언자들이 나타납니다.

학자마다 다르지만, BC 1000년 전후로 Hebrew 글짜가 탄생합니다.  히브리어는 페니키아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Latin어와 Greek도 페니키아 언어를 모체로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의 영어 Alpha-bet가 됩니다.  (제가 이 내용은 이번 주일에 설교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전에서-Oral tradition에서 글짜화 체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Bible-Biblo-책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언어적 체계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 결과 (요 1;14)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적은 예언자가 아니라 말씀 자체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찾아오셨다고 할 때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글자로 표현합니다.  Logos, The word, Road, Incarnation, The law로 표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문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계시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이 시대의 언어와 글짜를 갖고 있기에 예언자입나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글과 언어를 갖고 있기에 이 시대의 파숫꾼으로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우리들이 글과 언어를 갖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돌이커야 할 파숫꾼의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제가 처음 말씀드린 3개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글과 언어를 사용하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에스겔 32장 17-32 현대인의 위기 5번

에스겔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애굽의 멸망과 심판을 29장에서 32장까지 아주 길게 서술합니다.   읽으면서 반복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애굽을 서술 할까요?  이유는 애굽은 당시의 최고 강대국입니다.  오늘의 미국과 같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애굽이 바벨론에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이 시대의 문화와 정신에 패배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신문입니다.  신문에서 정치 경제는 매일 다루지만 교회는 일주 일에 한번 정도 하나의 section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지도적 위치는 끝이 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한느가 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익명성입니다.  익명성은 자신의 실체가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자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지고, 자신이 속한 단체로 대변됩니다.  자신의 실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삽니다. 우리는 머릿돌 교인입니다  나는 어느 동네에 삽니다.  어떤 차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어떠한 일을 합니다.  나의 직업과 사업은 무엇을 합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상대방은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합니다.  특히 저는 백만장자입니다.  저는 가난합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상칠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사는 동네, 직업, 수입을 알아보여고 합니다.  이름으로 나를 알지 못합니다.

이 부분에 현대인의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직업, 목회자, 동네, 교회, 집,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삶의 기능적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독과 슬픔이 있습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문화이고 정신과 사상입니다.  나의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러한 것들이 이 시대의 애굽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정신을 이 시대의 정신으로 바벨론으로 무너 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정신,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정신을 무머뜨릴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의 문화와 정신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와 정신에 이끌리어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은 이러한 외형적 치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외형적 치장, 익명성에서 실명, 나를 찾는 것이 신앙입니다.  돈을 벗어나서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은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돈과 직업과 나의 외형적인 것은 나의 신입니다.  god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이 망해서 간 죽음의 세계에 과거에 애굽과 자웅을 겨루었던 나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결과입니다.  죽을 것입니다.  헛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의 사상과 정신을 무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구별하며 우리들이 하나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에스겔 32장 1-17 현대인의 위기-4

성경 본문은 오늘도 바벨론에 의한 애굽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애굽이 당할 비참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굽을 멸망시킨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어제 제가 보낸 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아니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 세상은 물질의 지배에 의하여 진행 되어 갈 것이지만, 왜 이러한 것들이 영원 할 수 없는가를 설명드립니다.

이번에 Lotto가 13억불입니다.  한화로 1조 5천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금액에 당첨 될 확율이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을 300번 맞을 확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확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Lotto에 당첨되면 행운, Fortune이라고 합니다.

행운을 Fortune이라고 합니다.  행복 번영입니다.  이 단어는 동시에 운명, 우연으로 사용합니다.  Fortune 에는 Flower, 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꽃은 아릅답게 핍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꽃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을 화무십일홍이라고 합니다.  10일 이상 붉게 피는 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행운, 물질적 복, 번성, 축복된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여신 중에 행운의 여신을 Fortuna라고 합니다.  Fortuna도 Flower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여신의 그림을 보면 항상 둥근 공을 갖고 있습니다.  그 둥근 공위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때로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13억불의 Lotto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운의 여신이 공위에 걸터 앉아 잇다는 것은 Fortuna가 행운, 물질적 축복을 줄 수 있지만, 그 공은 어디로 어떠한 속도로 굴러 갈지 모릅니다.  그 행운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공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신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을 가리고 있습니 .  불행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질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행운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어지지만 빼앗깁니다.  그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행운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13억 불 복권의 행운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이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행운은 없고,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13억불의 Lotto 한 장 정도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운은 아닙니다.  우리의 복과 은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내일도 계속합니다.

 

에스겔 31장-현대인의 위기-3

Apple의 주가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i-phone Business가 약화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삼성의 사업 주종이 휴대폰 사업에서 전기 자동차로 변경하겠다고 합니다.  한국의 조선업은 2015년 중반까지 국가의 주력 산업이였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별안간 엄청난 적자가 보고되고, 국가가 도와 주지 아니하면 파산 직전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 날까요?  중국과 인도와 제 3 세계의 경제 발전이라고 합니다.  물론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오늘의 문제에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의한 애굽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애굽은 초 강대국입니다.  오늘 날의 영국, 미국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이 멸망하는 것을 앗수르의 멸망과 비유하십니다.  앗수르의 백향목이 쓰러지는 것 처럼 애굽도 쓰러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100년 전만 해도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입니다.  바벨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패망을 당합니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패자가 됩니다.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Apple영원하지 않습니다.  삼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삼성이 전기 자동차에서 성공 할 확율 보장하지 못합니다.  Google은 이미 10년전에 전기 자동차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Google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그러기에 Amazon은 Rocket을 우주에 쏴 올리고 있습니다.  인터넷 회사가 우주선 사업을 합니다.  불과 20년전의 세계 최고의 기업 Micro-soft는 해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비행기와 선박 Engine의 최고 기업인 영국의 Rolls-Royce도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경제 불황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날까요?  인류의 발전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이 시대는 다원화 시대입니다.  다원화는 절대성이 상실되고 상대성이 인정 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절대적 가치가 해체됩니다.  이렇게 절대적 가치가 해체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로 나타난 영국의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도시를 선물합니다.

도시는 City // Metropolitan이라고 불립니다.  이 두 단어는 capital 자본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본으로 중세의 봉건주의와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돈의 힘입니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사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유는 돈을 벌기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이 도시입니다.  이 시대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의 기능은 비인간화입니다.  돈으로 인간관계, 직장등 모든 것이 형성됩니다.   직장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은 얼마나 많은 수입을 올리는가에 따릅니다.   그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많은 수익을 창줄하는 가에 인정을 받습니다.  그 사람의 정직, 신실, 종교,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서 경제적 활동을 합니다.  그럼으로 삼성, Apple, Google, Amazon, Rolls-Royce의 생존여부는 얼마나 많은 수입을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돈은 상대적 가치의 대표성을 갖고 있습니다.  돈은 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돈은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원수로 만듭니다.  가롯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을 중단하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이 가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깊은 의미의 말씀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인류를 이렇게 반복을 하다가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에서 과연 행복과 사랑과 기쁨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러한 주제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