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0장 -현대인의 위기-2

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으로 애굽을 심판하십니다.

제가 어제, 인간의 이성과 철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으로 St. Augustine의 신의 도성으로 예를 들어 드렸습니다.  당시의 철학은 철저한 변증에 근거합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내용인가에 따라, 그 내용은 진실과 거짓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말이라도 상대방의 말을 제압하면, 그 말은 진리성을 갖습니다.  그 결과 웅변과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재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으로 수사학이 등장합니다.

St. Augustine은 이러한 수사학에 기초한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St. Augustine이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은 철학의 흐름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을 가졌기에 그는 기독교의 교부가 됩니다.  종교개혁가 Calvin의 종교 개혁하는 신학적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로마의 철학에 매료 됩니다.  로마인들의 합리성과 토론에 의한 진리 추구는 그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St. Augustine은 자신이 이렇게 로마의 철학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자신의 인간성, 죄악성은 변하지 아니하는 것에 매우 놀라게 됩니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면, 좀더 높은 철학적 사고를 가지면 자신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이 높아질 수록, 그의 치부, 죄에 대한 강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의 철학적 진리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머리에는 지식으로 가득차지만, 마음은 다스릴 수 없다는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집니다.  마니교는 혼합종교입니다.  선과 악을 대립적 관계로 봅니다.  선과 악들 동등한 세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은 오늘 날 기독교 이단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니교의 선과 악은 선의 힘으로 악의 힘을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마니교에 빠졌던 St. Augustine은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 장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선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행을 하지만, 우리 자신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을 행하지만, 그 선에 악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한 번의 절망을 합니다.  로마의 철학과 마니 종교도 자신의 죄성을, 탐욕과 음란과 욕심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는 Platon의 이원론에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 할 수 없고, 우리의 선은 절대선의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선은 선인 것 같지만 선이 아닙니다.  이러한 선의 강도가 낮아지면 악이 됩니다.  악은 선의 결여입니다.

Platon의 악은 선의 하부구조로 전락합니다.  마니교의 선과 악은 상대적 위치이지만 Platon은 악은 선의 하부구조로 나타납니다.  악은 선의 부패, 타락, 변질, 왜곡입니다.

이렇게 악을 선의 하부구조로 놓으면 우리의 의지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들이 악을 막을 의지를 가지면 선에서 악으로 변질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St. Augustine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는 로마의 철학, 마니교, 그리스 철학으로도 자신의 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St. Augustine 입장에서 이러한 로마 철학, 마니교, 그리스철학은 진리성을 갖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은 이러한 St. Augustine이 이러한 철학적 과정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이러한 철학이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본성, 죄악성을 철저하게 보게하는 역활을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라는 것은 철학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철학의 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절대적 죄성을 봅니다.

이시대의 교육, 지식,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성과 유용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자연세계를 지식과 과학으로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과 지식은 우리의 죄성, 탐욕, 경쟁, 사치, 배신과 같은행동을 절제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A truth가 진리되지만, The Truth는 진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철학들 부분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를 알려 주십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에스겔 29장 -현대인의 위기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Merry Christmas라고 하는 것은 특정종교, 기독교를 나타내는 것이기에, 적절한 인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Happy Holiday가 가장 적합한 인사라고 합니다.   이제 12월 25일은 성탄절이 아닌 Holiday가 되었습니다.  Holiday는 공휴일, 휴가를 의미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지만, 이 시대와 문화는 예수님과 기독교의 전통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이 사회의 현대화의 과정입니다.

이 사회는 전통적 가치를 거부합니다.  단일화된 사상과 표현을 무시합니다.  이 사회는 다극화시대입니다.  절대적 가치, 전통적 가치, 단일화된 사상을 죄악시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가장 잘 들어나는 것이 이 시대의 학교 교육입니다.  학교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도록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다극화의 수혜자중의 하나가 우리들입니다.  이민자들입니다.  과거의 전통적 백인 중심의 문화와 정치에서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를 수용하는 정책을 미국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미흡하다고 생각하지만, 백인 주류의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변혁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합니다.

이러한 다극화, 다양화의 가장 일조한 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어떠한 절대적 권위와 가치를 흔들어 놓은 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에서 종과 주인,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놀랄만한 사건이 됩니다.

또한 기독교는 변증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종교에는 변증과 철학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신화나 로마의 신화가 보여주는 것과 같인 신과 인간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능력의 차이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능력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과 변증이 동원되고 그 결과 신학이 나타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 이외의 것을 죄악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을 중요하시하는 것은 백번타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시대의 시간과 역사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계시 (Revelation)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통한 이 시대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는 철학과 변증을 기초로 하는 인문학이 발생합니다.  신적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교부들은 신적 세계를 강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St. Augustine이 쓴 신의 도성입니다.  로마가 하나님의 도시인에 이방인에게 망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신에게 패배했다고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변증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도성, 이방인에게 점령을 당하게 됩니까?  당시의 신자들은 로마는 하나님이 세운 도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Augustine은 로마는 하나님이 세웠지만, 인간이 지배하는 도시라고 변증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도시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은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을 알려주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뜻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제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과 사람의 균열이 시작됩니다.  매우 Irony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하나님과 우리가 멀어지는 과정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에 대한 징계입니다.  당시 최고의 문화와 군사와 정치 강국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강한 악어라고 합니다.  강력한 지도록 지팡이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지팡이는 지도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어를 낚시로 잡아 올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지팡이는 갈대 지팡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기술과 철학의 무능함을 지적하십니다.  이집트 문명의 허망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기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왓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이성과 지식과 철학과 변증을 우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 가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일도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