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2장 17-32 현대인의 위기 5번

에스겔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애굽의 멸망과 심판을 29장에서 32장까지 아주 길게 서술합니다.   읽으면서 반복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애굽을 서술 할까요?  이유는 애굽은 당시의 최고 강대국입니다.  오늘의 미국과 같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애굽이 바벨론에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이 시대의 문화와 정신에 패배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구성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신문입니다.  신문에서 정치 경제는 매일 다루지만 교회는 일주 일에 한번 정도 하나의 section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지도적 위치는 끝이 난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한느가 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익명성입니다.  익명성은 자신의 실체가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자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지고, 자신이 속한 단체로 대변됩니다.  자신의 실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미국에 삽니다. 우리는 머릿돌 교인입니다  나는 어느 동네에 삽니다.  어떤 차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어떠한 일을 합니다.  나의 직업과 사업은 무엇을 합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상대방은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인식합니다.  특히 저는 백만장자입니다.  저는 가난합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상칠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사는 동네, 직업, 수입을 알아보여고 합니다.  이름으로 나를 알지 못합니다.

이 부분에 현대인의 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직업, 목회자, 동네, 교회, 집, 사업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삶의 기능적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독과 슬픔이 있습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것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문화이고 정신과 사상입니다.  나의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러한 것들이 이 시대의 애굽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정신을 이 시대의 정신으로 바벨론으로 무너 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새로운 정신,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정신을 무머뜨릴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간의 문화와 정신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화와 정신에 이끌리어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은 이러한 외형적 치장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극입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외형적 치장, 익명성에서 실명, 나를 찾는 것이 신앙입니다.  돈을 벗어나서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은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돈과 직업과 나의 외형적인 것은 나의 신입니다.  god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이 망해서 간 죽음의 세계에 과거에 애굽과 자웅을 겨루었던 나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결과입니다.  죽을 것입니다.  헛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의 사상과 정신을 무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구별하며 우리들이 하나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에스겔 32장 1-17 현대인의 위기-4

성경 본문은 오늘도 바벨론에 의한 애굽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애굽이 당할 비참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굽을 멸망시킨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어제 제가 보낸 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아니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 세상은 물질의 지배에 의하여 진행 되어 갈 것이지만, 왜 이러한 것들이 영원 할 수 없는가를 설명드립니다.

이번에 Lotto가 13억불입니다.  한화로 1조 5천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금액에 당첨 될 확율이 하늘에서 내려치는 벼락을 300번 맞을 확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확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Lotto에 당첨되면 행운, Fortune이라고 합니다.

행운을 Fortune이라고 합니다.  행복 번영입니다.  이 단어는 동시에 운명, 우연으로 사용합니다.  Fortune 에는 Flower, 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꽃은 아릅답게 핍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꽃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을 화무십일홍이라고 합니다.  10일 이상 붉게 피는 꽃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행운, 물질적 복, 번성, 축복된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여신 중에 행운의 여신을 Fortuna라고 합니다.  Fortuna도 Flower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여신의 그림을 보면 항상 둥근 공을 갖고 있습니다.  그 둥근 공위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때로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13억불의 Lotto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운의 여신이 공위에 걸터 앉아 잇다는 것은 Fortuna가 행운, 물질적 축복을 줄 수 있지만, 그 공은 어디로 어떠한 속도로 굴러 갈지 모릅니다.  그 행운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공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신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을 가리고 있습니 .  불행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질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행운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어지지만 빼앗깁니다.  그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행운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13억 불 복권의 행운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이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행운은 없고,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인내하며, 하나님이 보여주실 길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13억불의 Lotto 한 장 정도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운은 아닙니다.  우리의 복과 은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내일도 계속합니다.

 

에스겔 31장-현대인의 위기-3

Apple의 주가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i-phone Business가 약화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삼성의 사업 주종이 휴대폰 사업에서 전기 자동차로 변경하겠다고 합니다.  한국의 조선업은 2015년 중반까지 국가의 주력 산업이였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별안간 엄청난 적자가 보고되고, 국가가 도와 주지 아니하면 파산 직전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 날까요?  중국과 인도와 제 3 세계의 경제 발전이라고 합니다.  물론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오늘의 문제에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의한 애굽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애굽은 초 강대국입니다.  오늘 날의 영국, 미국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이 멸망하는 것을 앗수르의 멸망과 비유하십니다.  앗수르의 백향목이 쓰러지는 것 처럼 애굽도 쓰러 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100년 전만 해도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입니다.  바벨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패망을 당합니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패자가 됩니다.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Apple영원하지 않습니다.  삼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삼성이 전기 자동차에서 성공 할 확율 보장하지 못합니다.  Google은 이미 10년전에 전기 자동차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Google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그러기에 Amazon은 Rocket을 우주에 쏴 올리고 있습니다.  인터넷 회사가 우주선 사업을 합니다.  불과 20년전의 세계 최고의 기업 Micro-soft는 해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비행기와 선박 Engine의 최고 기업인 영국의 Rolls-Royce도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경제 불황이 아닙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날까요?  인류의 발전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이 시대는 다원화 시대입니다.  다원화는 절대성이 상실되고 상대성이 인정 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절대적 가치가 해체됩니다.  이렇게 절대적 가치가 해체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이후로 나타난 영국의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도시를 선물합니다.

도시는 City // Metropolitan이라고 불립니다.  이 두 단어는 capital 자본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본으로 중세의 봉건주의와 교회를 무너뜨렸습니다.  돈의 힘입니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사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유는 돈을 벌기위한 수단입니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것이 도시입니다.  이 시대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의 기능은 비인간화입니다.  돈으로 인간관계, 직장등 모든 것이 형성됩니다.   직장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는 것은 얼마나 많은 수입을 올리는가에 따릅니다.   그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많은 수익을 창줄하는 가에 인정을 받습니다.  그 사람의 정직, 신실, 종교, 양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서 경제적 활동을 합니다.  그럼으로 삼성, Apple, Google, Amazon, Rolls-Royce의 생존여부는 얼마나 많은 수입을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돈은 상대적 가치의 대표성을 갖고 있습니다.  돈은 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돈은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원수로 만듭니다.  가롯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을 중단하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이 가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깊은 의미의 말씀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인류를 이렇게 반복을 하다가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복에서 과연 행복과 사랑과 기쁨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러한 주제로 하겠습니다.

에스겔 30장 -현대인의 위기-2

어제에 이어 계속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으로 애굽을 심판하십니다.

제가 어제, 인간의 이성과 철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으로 St. Augustine의 신의 도성으로 예를 들어 드렸습니다.  당시의 철학은 철저한 변증에 근거합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내용인가에 따라, 그 내용은 진실과 거짓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떤 말이라도 상대방의 말을 제압하면, 그 말은 진리성을 갖습니다.  그 결과 웅변과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재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으로 수사학이 등장합니다.

St. Augustine은 이러한 수사학에 기초한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St. Augustine이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은 철학의 흐름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을 가졌기에 그는 기독교의 교부가 됩니다.  종교개혁가 Calvin의 종교 개혁하는 신학적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로마의 철학에 매료 됩니다.  로마인들의 합리성과 토론에 의한 진리 추구는 그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St. Augustine은 자신이 이렇게 로마의 철학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자신의 인간성, 죄악성은 변하지 아니하는 것에 매우 놀라게 됩니다.  사람이 지식을 가지면, 좀더 높은 철학적 사고를 가지면 자신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이 높아질 수록, 그의 치부, 죄에 대한 강도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의 철학적 진리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머리에는 지식으로 가득차지만, 마음은 다스릴 수 없다는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집니다.  마니교는 혼합종교입니다.  선과 악을 대립적 관계로 봅니다.  선과 악들 동등한 세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은 오늘 날 기독교 이단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니교의 선과 악은 선의 힘으로 악의 힘을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마니교에 빠졌던 St. Augustine은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 장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선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행을 하지만, 우리 자신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을 행하지만, 그 선에 악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한 번의 절망을 합니다.  로마의 철학과 마니 종교도 자신의 죄성을, 탐욕과 음란과 욕심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는 Platon의 이원론에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을 행 할 수 없고, 우리의 선은 절대선의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선은 선인 것 같지만 선이 아닙니다.  이러한 선의 강도가 낮아지면 악이 됩니다.  악은 선의 결여입니다.

Platon의 악은 선의 하부구조로 전락합니다.  마니교의 선과 악은 상대적 위치이지만 Platon은 악은 선의 하부구조로 나타납니다.  악은 선의 부패, 타락, 변질, 왜곡입니다.

이렇게 악을 선의 하부구조로 놓으면 우리의 의지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들이 악을 막을 의지를 가지면 선에서 악으로 변질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St. Augustine은 자신의 의지로 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 그는 로마의 철학, 마니교, 그리스 철학으로도 자신의 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St. Augustine 입장에서 이러한 로마 철학, 마니교, 그리스철학은 진리성을 갖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은 이러한 St. Augustine이 이러한 철학적 과정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이러한 철학이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본성, 죄악성을 철저하게 보게하는 역활을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라는 것은 철학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철학의 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절대적 죄성을 봅니다.

이시대의 교육, 지식,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성과 유용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자연세계를 지식과 과학으로 잘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과 지식은 우리의 죄성, 탐욕, 경쟁, 사치, 배신과 같은행동을 절제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A truth가 진리되지만, The Truth는 진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철학들 부분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를 알려 주십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에스겔 29장 -현대인의 위기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Merry Christmas라고 하는 것은 특정종교, 기독교를 나타내는 것이기에, 적절한 인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Happy Holiday가 가장 적합한 인사라고 합니다.   이제 12월 25일은 성탄절이 아닌 Holiday가 되었습니다.  Holiday는 공휴일, 휴가를 의미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지만, 이 시대와 문화는 예수님과 기독교의 전통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이 사회의 현대화의 과정입니다.

이 사회는 전통적 가치를 거부합니다.  단일화된 사상과 표현을 무시합니다.  이 사회는 다극화시대입니다.  절대적 가치, 전통적 가치, 단일화된 사상을 죄악시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가장 잘 들어나는 것이 이 시대의 학교 교육입니다.  학교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도록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다극화의 수혜자중의 하나가 우리들입니다.  이민자들입니다.  과거의 전통적 백인 중심의 문화와 정치에서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를 수용하는 정책을 미국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미흡하다고 생각하지만, 백인 주류의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변혁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합니다.

이러한 다극화, 다양화의 가장 일조한 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어떠한 절대적 권위와 가치를 흔들어 놓은 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에서 종과 주인,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놀랄만한 사건이 됩니다.

또한 기독교는 변증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종교에는 변증과 철학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신화나 로마의 신화가 보여주는 것과 같인 신과 인간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능력의 차이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능력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과 변증이 동원되고 그 결과 신학이 나타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 이외의 것을 죄악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을 중요하시하는 것은 백번타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시대의 시간과 역사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계시 (Revelation)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을 통한 이 시대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는 철학과 변증을 기초로 하는 인문학이 발생합니다.  신적 세계와 인간의 세계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교부들은 신적 세계를 강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St. Augustine이 쓴 신의 도성입니다.  로마가 하나님의 도시인에 이방인에게 망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신에게 패배했다고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변증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도성, 이방인에게 점령을 당하게 됩니까?  당시의 신자들은 로마는 하나님이 세운 도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Augustine은 로마는 하나님이 세웠지만, 인간이 지배하는 도시라고 변증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도시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은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을 알려주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뜻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제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과 사람의 균열이 시작됩니다.  매우 Irony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하나님과 우리가 멀어지는 과정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에 대한 징계입니다.  당시 최고의 문화와 군사와 정치 강국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강한 악어라고 합니다.  강력한 지도록 지팡이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지팡이는 지도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어를 낚시로 잡아 올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지팡이는 갈대 지팡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기술과 철학의 무능함을 지적하십니다.  이집트 문명의 허망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기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왓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이성과 지식과 철학과 변증을 우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 가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일도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