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14-29절 (잘 하는 기도와 못하는 기도의 차이)

우리들이 기도를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 오시는데, 제자들이 어떤 아이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을 기도외에는 이러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기도 안 합니까?   아닙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으로 하루에 3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차이가 무엇입니끼?  똑같은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을 끓임없이 비우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듭니다.  귀신이 떠나갑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도 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폭이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확장 될 때에, 우리의 기도에 능력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1-13절 (모세와 엘리야를 벗어나서)

본문은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엘리야, 모세와 만나십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완전한 차별과 구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음성만을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모세의 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유대인의 신앙의 근원입니다.  모세는 모세 오경과 율법입니다.  엘리야는 유대인들에게 기적과 능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러한 신앙의 근원이 예수님에게로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많은 구성요소가 필요합니다.  모세적 신앙입니다.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르는 삶입니다.   또한 엘리야적 신앙입니다.  기적과 같은 신비적 요소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는 예수님의 형태, 죽음에서 부활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지만 완전한 신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모세적 신앙도 필요합니다.  기적과 신비도 필요합니다.  엘리야적 신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긍극적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요체이며 본지립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것을 확신하면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8장 27-38절 (신앙의 변곡점)

우리들이 수학에서 포물선을 배웁니다.  그리고 변곡점도 배웁니다.  운동 에너지가 완전히 바뀌는 점이 됩니다.  Plus가 Minus가 되고 Minus가 Plus됩니다.  수학에서 변곡점은 최고의 운동에너지입니다.  최저의 운동 에너지입니다.  최고와 최저를 지나야 새로운 운동 에너지가 나타납니다.

우리 신앙에도 변곡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누구냐고 질문합니다.  베드ㅀ의 유명한 고백이 나타납니다.

[막 8: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왜 예수님이 가이사야 빌립보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까?  그곳에는 로마의 우상, 제우스 신전, 지역의 우상 판신이 있고 무당들이 제사를 드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들 앞에서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우상을 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의 돈 앞에서, 명예 앞에서, 저존심, 나의 가정과 자녀, 나의 사업 앞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냐고 질문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똑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겠다고 할 때에 우리는 모두 안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것은 우리의 소원과 뜻을 거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이사 빌립보에 있는 우상들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8:35-37]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v.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v.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민해야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변곡점입니다.  이 선을 지나가야 우리들이 변화합니다.

우리들이 최악의 상태에서 우리의 이익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하면 상황은 반전됩니다.  변곡점은 최고의 운동에너지가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최선의 상황에서 우리의 자랑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하면 우리에게 최저의 운동 에너지가 나타납니다.  겸손과 하나님의 은헤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최고와 최저의 운동 에너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예수로 신앙 생활하지 않는다면 베드로와 같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의 무게를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8장 22-27절 (이상한 두번의 기적)

본문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시는데 두 번에 걸쳐 기적을 베푸십니다.

(v.23-25)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v.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v.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와 같이 보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잘 보입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 기적에 실패하셨습니까?  두 번째에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소경은 태어나서부터 소경입니다.  만약에 소경이 별안간 세상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밝은 빛에 굉장히 놀랄 것입니다.  자신 보는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이러한 배려를 하십니다.  일단 놀라지 않게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 째에 눈을 완전히 뜨게 하십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입니다.  영적 세계를 잘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하십니다.  계시는 점진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신앙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성실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약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마치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첫번 기적입니다.  은혜입니다.

이러한 것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영적세계를 계시하십니다.  그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로 영원한 세계를 봐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4-21절 (기적의 후유증-누룩)

바리새인들과 기적의 논쟁을 끝내고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어디로 건너 가셨을까요?  갈릴리 호수에 가보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갈릴리 호수를 놓고 동과 서로 반을 나누면 동쪽과 북쪽은 유대인지역. 서쪽과 서북 지역은 이방인 지역으로 봐도 됩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넌다는 것은 이방인 지역과 유대인 지역을 왕복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금 배를 타고 건너가신 곳은 유대인 지역에서 이방인지역으로 가는 것으로 해석을 해도 무방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 정결예식, Kosher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들이 이방인 지역으로 갈 때에 음식 준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면서 발견 한 것이 떡이 하나뿐입니다.  제자들은 이방인 지역에서는 떡을 사먹을 수 없기에 떡 먹을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떡 걱정을 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종교와 정치가 필요합니다.  교회에도 종교성이 필요하고 정치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가 누룩이 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누룩은 위선과 죄악으로 정치와 종교가 부풀려 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종교적 누룩입니다.  오늘 날의 종교적 누룩은 자신의 종교성으로 세상과 사람을 심판합니다.  성경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죄악시합니다.  자신과 뜻이 같으면 의인이고 자신과 뜻이 다르면 죄인입니다.  성경 몇 구절로 파당을 만듭니다.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라세인들을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정치적 누룩입니다.  오늘 날의 헤롯의 누룩은 힘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진리를 말살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돈과 권력에 최고 가치를 둡니다.  자신의 경쟁자를 철저하게 짓밝습니다.  자신들의 이을 위하여 상대방을 죽입니다.  마치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날의 헤롯은 인격적 살인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대인들과 경험했습니다.  7병 2어의 기적을 이방인들과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기적에 참여해서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떡이 하나로 걱정합니다.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떡이 없음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떡이 아닙니다.  누룩을 걱정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다만 너희 안에 누룩, 죄악을 걱정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먹고 마실 것을 걱정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죄악을 누룩을 조심해야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13절 (진정한 표적 십자가)

예수님이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표적, 적은 Hella로 Simeon 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Sign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Sign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교회 앞에 머릿돌 교회 간판이 있습니다.  Sign이 있습니다.  교회의 위치와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간판이 머릿돌 교회는 아닙니다.  머릿돌 교회는 간판이 아닌 건물과 그 안에 내용물들입니다.

기적도 똑같습니다.  기적은 현상이지, 예수님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되심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모세의 기적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고, 엘리야의 기적으로 엘리야가 하나님의 예언자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2018년은 빈부의 차이가 더욱 격화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민자인 우리들에게 쉽지 않은 해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합니다.  현재 직업의 30%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유와 행복을 빼앗는 우울한 소식들입니다.

이제는 가난해서 못사는 시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에 그는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이제는 돈으로 사는 시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한계가 보입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인류는 결국 과학과 기술, 돈의 포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적과 표적을 주십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표적,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위로와 말씀입니다.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럼으로 표적 중의 표적은, 기적 중의 기적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의 결정적 표적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이 시대의 표적과 기적으로 2018년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8장 1-10절 (안타까운 마음)

떡 7개와 물고기 2 마리로 사천명이 먹고, 7 광주리가 남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매우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자들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입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먹지 못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을 행하신 후에 달마누다로 가십니다.  달마누다는 마가단으로 번역도 되기에 오늘 날의 막달라로 보는 견해가 강한 것 같습니다.  막달라는 유대인의 지역입니다.  그럼으로 본문의 기적은 이방지역에서 행하신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지역에서 배를 타고 유대인의 지역으로 이동을 하셨습니다.

이방인 사천명이 주님을 따라왔을까요?  그들의 신분,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이 유대인의 지역에 들어가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방인을 개로 여기는 유대인의 풍습에서 이방인으로 유대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의 마음을 상상해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향해 떠나지 말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울면서 아쉬워햇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방인,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두고 떠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천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행하지만 이들을 두고 떠나십니다.

날이 매우 춥습니다.  성탄을 지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주제 넘은 비유지만, 우리의 많은 일들이 우리의 한계와 힘을 벗어나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해야하는 안타까움 마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이러한 자리들을 외면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니시는 모습에서 우리에게 작은 위로도 있지만 안타까움이 매우 큽니다.

마가복음 7장 31-37절 (에바다: 열려라)

예수님은 열린 분입니다.  Open minded person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인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죽는 것과 같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방인은 상대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으로 들어가십니다.  유대인의 한계와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리고 귀 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를 치유 하실 때에 에바다라고 하십니다.  열리라는 뜻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보면 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귀머거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그들은 말을 더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생각에 사로 잡힌 자들입니다.  그럼으로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적으로 공격을 당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은 유대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고, 자신들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계에 갇힌 사람은 귀머거리이며 말 더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갇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에바다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열라고 하십니다.  경계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면, 마음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적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립니다.

예수님의 에바다가 우리에게 나타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7장 24-30절 (떡과 부스러기)

예수님이 헬라여인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에게 개라고 합니다.  떡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날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매우 인종차별적 언행이 나타납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합니다.  떡은 당연히 먹을 수 없으니, 떡의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개 취급하십니다.  떡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개 취급하시고 떡을 줄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개 취급하시고, 떡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들이 개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이러한 말씀에 기분이 나쁘다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면에서 개보다 더럽고 악합니다.  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 음란, 도적질,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개라고 하셨고 예수님의 말을 들은 여인은 자신이 개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먹는 떡이 아닌 부스러기를 예수님에게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개와 같다고 하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먹는 떡을 주십니다.  이것이 반전입니다.

우리에게 떡이 필요합니다.  헬라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반전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로 차별하시기에 나를 개로 여기고 부스러기라도 만족하면 하나님이 떡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7장 1-23절 (기저귀를 찬 우리들)

교회에서 종종 아기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옆의 사람들은 아기다 더러운 것을 알지만 아기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전통에 대하여 질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장로제도가 생긴 것은 모세때 부터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격무를 보고 장로들을 세워 모세의 사역을 돕도록 합니다.  이러한 장로 제도는 선지자, 예언자, 왕들의 시대에는 큰 역활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과 유대가 망하면서 장로들이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올바른 판단입니다.  장로들은 율법, 모세 오경을 더 잘 지키려고 장로들의 전통을 만들어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손을 씻는 것과 고르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노력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각종 노력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장로들의 전통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v.8-9) 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v.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율법을 더 잘 지키려고 하지만 장로들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못 지키게 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더 잘 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더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결론을 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입으로 먹는 음식은 다 선하지만, 변으로 나오는 것은 다 더럽다고 하십니다.

율법, 장로들의 전통, 손을 씻는 것, 고르반 다 선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충실하고, 고르반과 같이 선교와 전도에 열정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러한 사명과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v.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v.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v.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v.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렇게 선한 것을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은 더러운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장로들의 전통을 질타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킴으로 그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의인이 되고, 지키지 못하는 것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깨끗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과 욕망의 화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행동으로 선하고 거룩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과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린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에게 상급을 받지만 너는 상급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로, 행위로 나는 너보다 깨끗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행위로 깨끗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인간입니다.  우리들이 깨끗해지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진 우리의 죄의 용서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으로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만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아기들이 귀저기에 더러운 것을 싸고, 냄새를 풍기면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들은 전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나의 실체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