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복음 6장 53-56절 (어디로 뛰어가고 있습니까?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v.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사람들이 뛰어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찾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뛰어서 찾아옵니다.

미국 마을의 역사를 보면 매우 흥미스로운 곳이 있습니다.  길 이름이 다음과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Church St.  Parsonage St. Rector St, Rectory Ave. Pastor St,  그리고 교회와 목사의 이름을 딴 거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와 관련된 길 이름을 짓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향하여 뛰어 오던 길입니다.

성탄카드를 사려고 Card 찾아보면 성경적 이미지의 카드가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구유 탄생,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는 것, 눈이 온 교회의 모습들은 점차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성탄절에는 이러한 카드로 채워져있엇습니다.

오늘 날의 카드는 산타클로스, Happy Holiday와 같은 가드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까요?  2천 년 전에는, 예수님을 찾아 사람들이 뛰어 다녔습니다.  약 백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교회의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한국도 전쟁 후에 가난하고 힘들 때에, 교회로 뛰어 왔습니다.

우리도 이민이 시작 될 때에 교회는 삶의 중심터전이였습니다.  모두 교회를 찾아 뛰어왔습니다.  그때에는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교회에서 세상으로 뛰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기적과 능력이 있습니다.  돈이 있습니다.  명예와 부가 있습니다.  세상에 비트코인의 기적이 있고, 부동산과 주식의 기적이 있습니다.  환자를 잘 고치는 의사와 병원 약의 기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보다 이러한 곳으로 뛰어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로 뛰어 올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디로 뛰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기적입니까?  우리는 왜 교회로, 예수님에게 뛰어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으로 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45-52절 (기적의 실상과 부작용)

어제 기적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52 )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음이 돌같이 굳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돌과 같이 딱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돌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굳어졌습니다.  기적의 떡을 먹고 배탈이 났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적을 분명하게 믿습니다.

성경은 기적의 떡을 먹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기적 이후의 사후처리가 문제입니다.  기적은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마음이 굳어집니다.  믿음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도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되심을 나타내는 계시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됨을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가 계시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계시의 방법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주권적이기에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저는 본문에만 근거해서 기적을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주의: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매우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

어떤 분은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분에게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계시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기적을 주실 수도 있고 기적을 주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성경으로.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이 계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으로 믿음을 주십니다.

왜 선교지에서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까?  왜 4-50년 전에 한국 교회에 기적이 많았습니까?  왜 우리들이 어려운 일도 방황 할 때에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십니까?  왜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살아납니까?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적이 더 효과적 계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기적을 믿음이 좋아서, 영성이 강해서라고 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때로는 사기에 가깝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러한 기적의 사기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왜 오늘 날 우리에게 기적이 없습니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론적으로 계속적으로 기적을 원한다면 그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저는 본문에만 근거해서 기적을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저의 설명은 하나님의 주권을 일부분으로 설명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기적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30-44절 (기적과 나의 십자가)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로 오천명을 먹고 12 바구니 남은 사건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됨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정치적, 사회적 해결자가 됩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오병이어의기적으로 하나님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자신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십자가에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소망의 대상에서 절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갈등과 긴장의 끝이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현상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문제의 해결의 하나님의 개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들어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계속적  추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등과 긴장의 구조로 나타납니다.  기적을 얻으려면 우리들이 믿음과 신앙의 행동을 해야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 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거래관계가 됩니다.  율법적 관계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지 않으면 배신감이 나타나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 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 완벽한 계시의 삶을 추구해야합니다.  그것은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십자가는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며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책임입니다.  나의 이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면, 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인도하심으로, 은혜와 감사가 나타납니다.  진정한 기적, 하나님의 간섭과 손길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아침이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14-29절 (더러운 춤 값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많이 봤던 그림이 있습니다.  살로메가 춤추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화가들은 그녀의 춤을 더러운 춤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참수 당한 세례 요한의 머리나 칼을 그렸습니다.

살로메가 더러운 춤을 잘 추자 분봉왕 헤롯이 무슨 요구든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살로메의 엄마 헤로디아는 자신과 분봉왕 헤롯의 부정한 결혼을 지적하고 비난한 세례요한을 죽여 달라고 살로메에게 요구합니다.  살로메는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목숨을 춤 값으로 달라고 합니다.

분봉왕 헤롯이 살로메의 더러운 춤 값으로 세례요한의 목숨을 지불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 허망합니다.  세례 요한은 비천하고, 타락하고, 더러운 헤롯과 헤로다아의 복수로 죽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더러운 것을 위하여 깨끗한 것이 죽습니다.  쓰레기를 위하여 보석을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평생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숨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까?  고귀한 것입니까?  우리는 돈을 위하여, 먹고 사는 것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 값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과 다르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살로메는 돈입니다.  돈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분봉왕 헤롯은 이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먹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시대의 행복과 안전을 제공하는 발판입니다.  마음의 여유를 주며 사악한 마음을 갖지 않게합니다.  돈의 긍정적 기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간과 육체는 이러한 돈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투자합니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계선을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들이 돈의 힘은 인정하지만 돈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포로가 되면 사람은 명예와 자존심, 가치와 존귀함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돈과 교환하게 됩니다.  그러면 돈의 힘으로 자신과 이웃을 평가합니다.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관계를 지적했습니다.

우리도 돈에 끝없는 저항을 해야합니다.  돈이 아닌 것으로 살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해야합니다.  돈이 아닌 것으로도 우리 자신을 명예롭게, 신실하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해야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춤 값으로 지불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과 명예와 가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돈과 싸운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목숨을 더러운 춤 값으로 지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계선을 지키는 자를 성경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힘의 원동력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돈을 위하여 사는 것 같지만 끝없는 싸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7-13절 (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

저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v.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소유하신 권능과 능력을 똑같이 주십니다.

(v.8-9)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v.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돈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v.10-11)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v.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이해관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그들이 거절하면 복음 전하는 것을 너무나 애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예수님의 제자로 사역을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돈을 갖고 가지 말고, 누구의 집에서라도 머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하나님이 책임을 지심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과 세상의 사역이 중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종교의 타락은 우리들이 사람답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도 질서도, 양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든지 할 수 있다는 무례와 방자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세상의 윤리도 무시합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전도해야합니다.  구제도 최고의 정성으로 해야합니다.  기도 열심히 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우리의 성질을 죽이는데서 시작합니다.  나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우리의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irony 합니다.

(v.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v.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역의 결과를 이러한 결과로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어진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도전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허락 받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 1-7절 (위험한 인물에서 우리의 구세주로)

예수님이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가면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어뜨리려고 한 언덕으로 상상 할 수 있는 곳을 가보게 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을 한 이유는 예수님 한 사람의 행동으로 동네 사람들이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반란자의 동네는 몰살을 시켰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에는 매우 흔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에서 두 가지를 유추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의 예수님은 로마의 입장에서 매우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럼으로 고향사람에게도 위험한 인물이 됩니다.

둘째는 이러한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기에 예수님의 주변 인물은 위험한 인물로 채워집니다.  제자중에 상당수가 열심당원 출신들입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정부를 세우길 원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무리라고 합니다.  Oaklos입니다.  법적 신분권이 보장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제자들도 어부입니다.  어부는 당시의 생계 수단의 마지막입니다.  땅을 빼앗긴 농부들이 유일하게 물고기를 잡아 생존 할 수 있는 업종입니다.   배와 그물을 버렸다는 의미는 그 생존 수단마져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 주변의 인물들은 정말로 위험한 인물들입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험한 인물이 인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렇게 위험한 인물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위험한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과 기도의 목적이 됩니다.

이렇게 위험한 인물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비와 하나님의 경륜에 고개를 숙입니다.

2천 년 전의 갈릴리의 예수, 목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고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로마의 반역자, 동네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사람, 그 분이 오늘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신비와 기적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5장 21-43절 (찾는 곳과 함께 가는 것-2)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v.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와 함께 가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집행을 관리하고 회당의 예배를 관장합니다.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짓습니다.  율법과 제사를 대신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이러한 회당장의 태도를 알면 회당장을 어떻게 처리 할까요?  예수님과 같은 등급으로 처리 할 것입니다.  회당장은 자신에게 찾아올 불이익과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자신의 딸을 살리고져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소녀로 부르십니다.  소녀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장인 마가 6장에 헤롯이 요한을 죽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춥니다.  6장 22절에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합니다.  이때에 성경은 헤롯이 살로메를 “그 여아에게” 라고 합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관계는 친딸과 친 아버지가 아닙니다.  다른 아버지의 딸입니다.  수양 딸이 됩니다.  이것이 소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회당장의 딸을 친 딸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어원적으는 수양 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딸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소녀라고 합니다.  영어번역은 Damsel 로 번역을 했습니다.  포괄적으로 입양한 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회당장은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제가 좀더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회당장은 자신의 수양 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딸을 재산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아이 노예의 값은 남자 아이 노예의 값이 반입니다.  회당장은 노예를 딸로 입양 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회당장의 딸이 수양 딸이라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가를 알게 됩니다.

노예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인간관계이지만 그것을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회당장에게 예수님은 함께 가십니다.

우리에게 회당장의 모습이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 21-43 (찾는것과 함께 가는 것-1)

사람들을 헤어지며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에서 서로 찾아주며, 함께 가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누가 나와 함께 가며 누가 나를 찾아줍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주시며, 우리와 함께 가시길 원합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나옵니다.  혈루병은 오늘 날의 하혈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으로 볼 때에, 성병으로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신분은 천하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능력있는 사람의 몸을 만지면 그 능력이 자신에게 전가 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몸을 만질 수 없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으로 만족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보니, 예수님의 몸을 만질 형편이 못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졌을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나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십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과 형편에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군중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그저 군중심리에 휩쓸리어 신앙 생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게 해야합니다.  우리의 깊은 죄를 보고 슬퍼하며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고백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나의 죄를 통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렇게 원망합니다.  Why me?  왜 나를 이렇게 고통을 주십니까?  너무나 억울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인생 자체가 더욱 더 불행해집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창녀이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깊은 죄악으로 슬퍼합니다.  우리도 혈루병 걸린 여인과 같이 내가 당하는 일의 나의 죄악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고 해야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없어도 됩니다.  비천한 인간이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깊은 기도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때로는 이미 주어진 응답이고 우리가 원하는 응답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대강절입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둘중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군중이 되든지?  혈루병 걸린 여인이 되든 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누구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마가복음 5장 1-24절 (최초의 이방 선교사와 선교의 방향)

거라사의 광인은 지난 수요일에도 설명을 했기에 생략합니다.  이 지명은 성경에서 가라다라고도 부릅니다.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돼지 2천 마리가 몰사했다면 이방인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높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돼지들이 산에서 비탈로 돼지들이 바다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비탈의 원문은 절벽입니다.  영어번역은 Steep place 입니다.

갈릴리 호수 반대편, 이방인 지역이 되며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호수 중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이방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던 귀신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v.18)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v.19-20)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v.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데카볼리는 데카 // 10개의 // 볼리 // 폴리스 // 10개의 이방인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최초의 이방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예수님의 선교방법이 나타납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이방인이고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와 사고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이방인의 사역자를 세웁니다.

바울도 선교했지만, 그 지역의 사역자를 세웠습니다.  그의 선교 기간과 교회의 머문 기간을 측정하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는 아주 짧게, 열흘정도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약 1-2년 정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통과 거리를 생각하면 바울은 선교지에서 그 지역 출신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거라시의 광인은 교회의 미래와 선교에 대한 귀한 지침과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는 자를 두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미래는 그 지역이 교인들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교 방향을 잘 알려 주십니다.

마가복음 4장 35-41절 (풍랑과 깊은 호흡)

풍랑이는 호수에서 죽게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바다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우리들이 인생의 위기, 풍랑을 당했을 때에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신다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들이 문제를 해결 할 때에 문제 해결의 방법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갖고 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니 주님을 깨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안에 주무시는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할까요?  폭풍을 만나는 바다에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면 배가 난파 될 때까지 주무실까요?  제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실까요?

우리는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데는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와 예배로 예수님을 깨우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을 매우 신앙적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절대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위기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러나 주무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수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풍랑이 잠잠해지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내가 깰때까지 참고 기다지 않았는가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믿음이없다고 하십니다.

믿음은 깊은 호흡을 하고, 예수님이 하실 것을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풍랑이 닥치지만, 깊은 호흡을 하고 예수님이 깰때까지 기다라는 것도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